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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컬럼 • ‘을미사변’ 128주년에 다시 생각한다 13 참다운 선린이 되려면 일본의 왜곡된 교과서도 독 도에 대한 주장도 전범에 대한 참배도 수치로 인식 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일본사람들은 때때로 한 국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거사에 집착한다고 말할는 지 모르겠지만,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한심하게도 너 무나 과거사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재미학 자도 있다(방선주). 그는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증언집”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면 서 이런 말을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다. “진정한 화해 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서로가 잘 안다 는 바탕 위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Reconciliation is only possible on the basis of knowledge of what happened).”라고. 그러나 이 말도 그 자신이 한 말이 아니다. 나치만행의 사냥꾼이라고 불리우는 Mr.Wissenthal이라는 사람이 쓴 책 『우리 주위의 살 인자들』이라는 책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독일 사람들은 아직도 과 거에 대한 “죄의식의 과잉상태”에 빠져 있는데 반해 서 일본사람들은 “죄의식의 태무(殆無)상태”에 놓여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최정호). 죄의식이 없으니 수치 심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독일은 “과거와의 대결”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여 오늘의 새로운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있는데 반해서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 살려 “과거로 회귀”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지나 않는 지 모를 일이다. 70%가 넘는 중의원 의원들이 일본의 현 평화 헌법의 개정을 찬성하고 있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일본에 한번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런 행위가 영광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그 사례 하나로 명성황후 시해(弑害)사건 의 진실에 관한 얘기를 한번 해보자. 1895년 10월 8일 왕비 무참히 참살 1895년 10월 8일 새벽(음력 8월 20일). 서울에 주 둔중인 일본 병력 450여명 중에서 몇 명만 빼놓고 모 두를 동원, 3개 중대로 나누어 경복궁을 침입한 뒤 남 의 나라의 황후를 시해하였다. 침입병력 중에는 시 정잡배만도 못한 숱한 낭인(浪人)들도 끼었고 일본군 인과 경찰간부도 포함되었다. 더러는 조선군사의 복 장으로 위장하고 가담한 자들도 있었고, 우범선 처럼 제2지대장이란 직함을 지닌 한국인도 동원되었다. 대원군도 납치되다 시피 끌려와 일본 군사들의 감시 를 받으면서 영문도 모르는 채 쿠데타의 주인공처럼 꼭두각시노릇을 하고 있었다. 경복궁 담을 넘어 침입한 이들 군사들은 제각기 부 여된 임무대로 한부대는 궁안 맨 끝에 자리잡고 있는 건청궁(乾淸宮)으로 달려가 궁문을 부수고 왕의 처소 인 장안당과 왕비의 침실이 있는 곤녕합을 아수라장 으로 만들면서 그들의 암호인 “여우(명성황후)”를 찾 아 광분하였다. 그러는 사이 일국의 군주인 고종은 멱살을 잡힌 채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면서 곤욕을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위해 1900년(광무 4년)에 설치한 ‘장충단’ 비. 1901년에 임오군란·갑신정변 때 희생된 충신들도 장충단에 같이 모셨다(서울시 중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