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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의원 컬럼 • 3·1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어 본다 13 가지고 가 중국어 · 영어로 번역하여 중국신문에 실렸 다. 중국신문에 실린 3 · 1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없다. 그 이유는 당시에 민족대표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쇄를 하기 위 해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조판을 하고, 천 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로 옮겨 인쇄를 하려고 하 였다. 그러나 신문관에서 선언서의 조판본은 모양이  좋지 않아, 보성사에서 다시 조판을 하였다. 보성사에서는 조판한 활자판을 가지고 지형을 만 들어 대량으로 인쇄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독립 선언서에 맨 마지막에 들어가 있는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 정해지지 않아 지형을 여러 차례 만들 수밖 에 없었다. 독립선언서에 들어가는 민족대표 33인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1919년 2월 27일 오후였 다.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된 이후 독립선언서는 이 날 바로 인쇄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3 · 1독립선언서는 약 1만 5 천매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배포되었다. 민족대 표 33인의 신문조사와 판결문에는 독립선언서가  21,000매가 인쇄되었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를 작성 하고 인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었 고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독립 선언서 인쇄를 책임진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3 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그의 명령으로 인쇄를 담당한  보성사 공장감독 김홍규는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 를 치루었으며, 인쇄에 관여한 보성사 총무 장효근 도 5개월 동안 고초를 당하였다. 지방에서 등사된 3 · 1독립선언서 3 · 1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많은 만세 시위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낭독된 후 태극기 를 가지고 만세시위에 돌입하였다. 따라서, 보성사에 서 인쇄된 3 · 1독립선언서만으로 그 수요에 감당하 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3 · 1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3 · 1독립선언서를 다시 인쇄되거나 혹은  연희전문학교 학생 정석해가 등사하여 철산의 유봉영에게 보낸 3 · 1독립 선언서 등사본 목포 정명중학교에서 발견된 3 · 1독립선언서 필사등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