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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로 삼아 부정부패를 배척하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당시 세도 정치가였던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 기도 했다. 비슷한 이유로 대원군 섭정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스승인 이항로가 대원군을 정치적으로 지 지하고 있었기에 스승의 생전에는 조용히 있었을 뿐이었다. 경복궁 중건을 하는 대원군을 맹렬 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다 관직을 잠시 뺏기기도 했다. 구국(救國)의 대의를 천명, 자주적 민족주의 운동 실천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 자 대원군에 대해 더욱 적대적으로 변했다. 1873년 상소를 올려 왕이 성년이 됐으니 대원군이 섭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대원군 섭정이 끝나고 최익현 선생은 반 흥선대원군파의 선두에 서게 된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것도 잠시뿐 조정의 대신들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한다며 지적하여 대원군계 인사들로부터 규탄을 받았 으며 민씨 일족의 폐해도 비판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1876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도끼를 메고 광화문으로 가 개항 불가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했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내 머리는 잘라도 내 머리털은 못 자른다”며 완강히 버티기도 했다. 일제가 하나둘 조선의 목을 조이는 것을 볼 때마다 상소를 올리고 호소를 했던 최익현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더이상 상소만으로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 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80명으로 시작한 의병이 900명으로 1906년 충남 노성 궐리사에서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알려 국권회복에 노력해줄 것을 호 소했다. 제자의 소개로 만난 임병찬은 “호남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으니 그곳으 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최익현 선생은 가족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남으로 내려간다. 그해 6월 최제학, 고석진(高石鎭) 등 문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무성서원에 도착해 강연한 뒤에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때 그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사생을 맹세하였다. “지금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나 우 최익현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