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page

12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와 일진회 회원을 처단했으며 갈평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다. 문경에서는 패배했으나 가을에 들 어서는 적 500여 명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전세는 다시 불리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풍기 백자동에서 적 100명을 사로 잡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이강년 선생이 과로로 병을 얻어 풍기 복상동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신분을 초월한 지지가 연승의 바탕 이인영과 허위 등의 의병장은 분산적으로 전개되어온 의병활동으론 일제를 막는 데 한계가 있음 이 분명해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해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서울을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이강년 선생도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지만 일본군의 저지로 경기도 초입에서 더이상 서 울로 가지 못하고 지역으로 돌아가 의병활동을 계속해나갔다. 2월 용소동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해 강원도 인제 백담사 전투, 안동 서벽전 투, 봉화 내성 전투, 안동 재산 전투 등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 선생이 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출신으로 지역 지리에 밝고 동학운동에 참여할 만큼 지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식량조달, 현지 정보망 구축과 함께 유림, 선비, 농민 등 다양한 각층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마철에 벌어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안타 깝게 적에게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재판장에서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강년 선생은 결국 1908년 10월 13일 51세로 의기에 찬 일생을 마쳤다. 운강 이강년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