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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2025년 2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실질적인 배후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 일) 대한제국으로서는 경천동지 할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의 낭인(浪人)들이 건천궁에 난입 하여 명성황후를 참살하였다. 이 사건의 실질적인 배후는 당시 총 리대신 이토였다. 이해 9월 1일에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 浦梧樓, 1847~1926]는 조슈번의 군인(중장) 출신으로 행동대장이 었고, 전임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 토 히로부미와 함께 에도(도쿄)의 영국공사관 방화, 영국 밀항 유학, 연합국과의 5개 조항 강화 조약 체결 등을 함께 한 동지로 야마구 치시의 유다무라[湯田村] 출신이 었다. 이토는 명성황후 참살 과정 의 꼭대기에 있었다. 을사늑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제 2차 한일협약)’ 강제 체결의 원 흉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 사늑약의 체결은 대한제국의 박 제순과 일본제국의 하야시 곤스 케[1860~1939, 林權助]가 서명 인이었다, 당시 총리대신은 하 기 출신의 가쓰라 타로(桂太郞, 1848~1913), 체결 장소는 경운 궁의 중명전(重明殿)이었다. 이 조 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 탈을 당하여 ‘있어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당시 이토는 직위가 추밀원장 (樞密院長)으로 을사늑약의 표면 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막후에서 활동한 실질적인 일등공신이었 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1850~1924]가 있었다. 을 사늑약은 1905년 11월에 이토가 ‘광무제 위문특파대사’ 자격으로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에 서울 도착한 이토는 10일 에 광무제(고종)에게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고 15일부터 한일 협약안 체결을 강요했다. 하세가 와는 중명전 주변을 군대로 포위 하고 원구단(圜丘壇)에 야포를 설 치하여 공포를 조장했다. 16일에 도 하야시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협박하고, 이토는 대신들을 그의 숙소로 불 러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17일 오후 3시가 되어도 결론 ➒ ➒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요된 경운궁 중명전(복원, 국가유산청 제공) ➓ 전문(前文0과 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을사늑약’ 조약문(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독립기념관 제공) 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