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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25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다 그 후,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과 합류하고 며칠 후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 선생의 의병과 합류했 다. 당시 일어났던 의병들은 대부분 문인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고전하고 있 었으나 무장 출신이며 실전경험까지 풍부한 이강년 선생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 르게 됐다. 하지만 관군에게 패해 유인석 선생은 요동으로 건너갔고 이강년 선생은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했으나 더이상 의병부대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해산하고 단양으로 피신했다. 1년 후 요동 으로 가 유인석 선생을 만난 이강년 선생은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정비 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 직접 적과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찾아야 한다는 소 신으로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강년 선생은 옛 동지와 덕망 있는 유림의 선비들을 만나며 나라의 앞날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의 준비를 해나갔다. 그동안 의병 활동을 하면서 쌓은 실전경험을 바탕 으로 「속오작대도」를 저술한다. 「속오작대도」는 의병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수록되 어 있다. 광무황제의 도체찰사 임명, 의병의 도창의대장 추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시켜갔다.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군대 해산은 본격적인 의병활동의 시작이었다. 해산된 군인 대부분이 의병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강년 선생은 유인석 선생과 상의 후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한 뒤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강 년 선생의 소식을 들은 광무황 제는 비밀리에 밀조를 내려 이 광년 선생을 도체찰사에 임명했 으며 의병들은 그를 도창의대장 으로 추대했다. 7월부터 시작한 전투는 승리 와 패배를 거듭해가며 점점 더 큰 승리를 거뒀다. 일제 앞잡이 1908년에 쓴 선생의 옥중서한들.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아들에게 당부하는 글과 자신이 일본 군에게 잡혔을 때 심정을 묘사한 글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