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page


125page

김복현 金福鉉(1890. 10. 7. ~ 1969. 6. 22.) 운동계열: 3.1운동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김복현(족보명 鍾遠, 이명 哲·鐵, 호何山)선생은 1896년 봄, 나주에서 봉기한 의병의 좌익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김창균의 다섯째 아들이다. 1919년 3월 초, 서울에서 조선독립 만세운동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선생은 이를 고향에서도 일으킬 결심을 하고 「독립선언문」, 「동포에 고하는 격문」, 「독립가」등을 구해 광주로 내려왔다. 그는 같은 해 3월 6일 밤, 광주군 효촌면 남궁혁의 집에서 김강·최병준·송흥진·최정두·김태열 손인식·강석봉·김용규·길상 등과 함께 모여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선언문과 격문, 태극기 수천 매를 인쇄하여 시민과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25page

1919년 3월 10일, 광주교 아래 장터에서 열린 시위에는 1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여했으며, 김복현은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이 운동의 주모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한 학생들은 돌려보내라. 내 이름은 김철(金鐵)이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해볼 테면 해보라.”라고 당당히 항변하였고, 이때부터 ‘김철(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출소 후에도 선생은 아들 김재호가 활동하던 상해 의열단에 독립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하였으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 태어난 자녀들의 이름을 자신이 머물던 지역 이름에서 따온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 부위원장으로, 1946년에는 신민당 전남지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고 1960년 4·19혁명 때는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등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9년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