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page
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⑤ 125 다. 데라우치는 일단 조선의 지도 층 인사들의 활동을 통제함으로 써 일본의 강제병합에 대한 반발 의지가 확대되어 가는 상황을 저 지하였다.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 으로 99인은 무죄, 6인은 가벼운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무고하게 가해진 고문과 그 고통은 엄청났 다. 당시 19세였던 선우훈의 진술 이다. “ …포승줄로 묶은 다음… 높은 대들보에 매달아 두레박처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채찍으 로 온몸을 마구 때린다. 이러기 를 20여 분 당하고 나면 곧 기 절하고 만다. 그러면 취조원은 불에 벌겋게 달군 쇠 젓가락으 로 다리를 지지고 담뱃불로 얼 굴을 문지르며 그가 죽었는지 를 확인한다. 그래도 아무 기척 이 없으면 줄을 늦추어 공중에 서 내려놓고 채찍으로 치며 구 둣발로 내질러본다. 감각이 되 살아나 꿈틀거리면 물 두 주전 자를 코에 부어 이리저리 마구 굴린다. 그러면 갑자기 가슴이 탁 열리면서 한숨을 내뱉게 된 다. 잠시 멎었던 호흡이 다시 시 작되면 죽은 척 능청부리지 말 라며 또다시 매질을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혼수상태가 3~4번 반복된다. …‘비둘기장’이 기다 리고 있었다. 이 비둘기장은 사 방 길이와 높이가 넉자(1.21미 터)밖에 안 된 콘크리트 상자로 두 팔이 묶인 채 들어가면 설 수 도, 앉을 수도, 그렇다고 누울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다. 그대로 2~3일 지나 면 온 몸 마디마디가 저리다 못해 마 비되어 버린다.” 이러한 모진 고문으로 현장에 서 사망한 사람도 있었고, 남성을 상실하거나 안구가 빠지는 등 상 상을 초월한 피해를 당하였다. 데 라우치의 105인 사건 조작의 목 적은 이러한 고문의 실상을 알려 조선 지도층을 협박하는 것이었 는지도 모른다. 그 배후에 헌병사 령관 아카시 모토지로가 있었음 이 틀림없다. 데라우치의 조선교육령과 전통 문화 해체 데라우치는 1911년 ‘조선교육 령(제1차)’을 세워 일본어 학습을 강요하였다. 조선인에게는 실업 ➌ 지난 2월 27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경복궁의 ‘선원전’ 편액이 최초 공개되고 있다(한국일보 제공) ➍ ‘데라우치문고’가 있는 야마구치현립대학 전경(와세다일본어학원 제공) ➌ 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