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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의병항쟁 정주원(鄭周源)[1870~1925]은 1907 군대 해산 후 일제의 침략에 항쟁한 항일 의병장이다. 그는 충청도와 경기도를 통합하는 13진도통대장에 올랐고, 수백 명에 달하는 의병을 지휘하였다. 정주원은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 출신으로 경기도 안성시 죽산에서 창의한 당진 출신의 의병장이다. 정주원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빈곤했다.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직후, 서용범 의병에 투신하여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정주원은 용인 일대에서 항전 하였으며, 충청도 당진과 서산 등지로 배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원은 400~500명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활약하였다. 한때 경기, 충남북 지역의 의병 연합체인 13진도총대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의 부대원으로는 최종성, 정선경,하군배,심주현,김성백,최기운,손응현,신준중, 신성오 등의 당진 출신과 서산 출신의 이상덕, 김쌍봉, 덕산 출신의 조성습 등이 있으며, 경기 출신인 안춘경, 신현구, 최국만, 박덕삼, 황명운 등이 있다. 일부 대원들은 정주원이 체포된 후에도 의병을 인솔하고 항일전을 지속하였다. 정주원 의병대는 정주원과 심주현등이 양반으로 알려졌으나, 그 외 의병들은 농업에 종사하던 평민 출신으로 보인다. 또한 일부는 어물상이나 대장장이 같은 직업을 가진 인물도 있었다. 이들은 1908년 여름까지 활발한 투쟁을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일본 경찰과 한인 경찰을 사살하고, 침략의 하수인인 일본 상인과 친일파 일진회원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정주원 의병장이 체포된 후, 당진 의병의 활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정주원은 체포되기 전, 다섯 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대호지면 적서리의 대부호인 차숙보(1859~1945)의 집에 숨에 3개월간 살았다. 그리고 부근에 있는 적서리 방구 바위 산기슭에 있던 당재 강당과 구지정에 활터와 과녁을 만들어 놓고 마을 장정들을 훈련시켰다. 증언 기록에 따르면, 1908년 7월 19일 암호 약속을 잘못하여 의병 4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들이 일본 경찰에 매수당하면서 정주원이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정주원은 1908년 11월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유형과 지역 3년으로 감형받았다. 정주원은 복역 후 석방되어 송악면 가확리에 거주하다가 1925년 1월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숙성리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