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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2024년 5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의장 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독립운동단체 통합의 뜻을 이루 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지만, 정 의부와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단체 통합운동 을 계속하였다. 김동삼은 1931년 9월 일본의 중국 동북지방 침략사 태인 ‘만주사변(일명 918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에서 새로운 활 동을 모색하던 도중,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1937년 4월 13일 서울의 마포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협동학교 1907년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 을에 문을 연 협동학교는 안동(경 북)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 기관이었다. 이 학교는 당시 상투 를 자르고 근대학교에 간다는 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안동지 역 구국계몽운동의 요람이자, 보 수성이 강한 안동 유림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킨 발원지였다.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은 백하 김대락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를 29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만 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 김대 락의 아들로 해방직후 김구와 김 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 장을 맡았던 김형식도 이 마을 출 신의 독립운동가다. 이 마을에서 만주로 독립투쟁에 나선 이는 150 여 명에 이른다. 의성 김씨 문중서당인 가산서당 에서 출발한 협동학교는 류인식· 하중환·김후병 3명 명의로 설립했 다. ‘안동군의 동쪽에 위치한 7개 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다’는 뜻에 서 학교의 이름을 ‘협동(協東)’이라 했다. 설립 당시 재원은 호계서원 의 재산을 기반으로 김병식은 초 대 교장을 맡았고, 김동삼은 실질 적 교육자로 활약했다. 재학생 의 연령은 대개 20세가 넘었다. 학생 들 대부분은 기숙사 생활을 했으 며, 교사들은 대개 내앞마을의 의 성 김씨들과 임동면 한들 전주 류 씨 사람들, 그리고 서울 신민회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또 이곳에 서 양성된 1세대가 다시 모교의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3 · 1독립만세 뒤 강제 폐교까지 이 학교 졸업생은 64명이 넘는 것으 로 추정된다. 당시 65세의 노유학자 김대락 은 협동학교가 활기를 띠는데 결 정적 역할을 했다. 평생 보수 유림으로 살아온 김 대락은 처음에는 신학문도, 학생 들의 단발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 다. 그런 그가 “내가 신교육에 대 하여 그 시무(時務)에 필요됨을 일 찍 깨닫지 못한 것이 큰 한(恨)이 라. 이제 비로소 깨달았으니 어찌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황성신문』 1908.9.27) 1912년 협동학교 이전과 개교통 지서 1916년 협동학교 제3회 졸업식(이상 경북일 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