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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⑤ 123 술국치’ 이후에는 조선 주둔 일본 군 헌병사령관이 되어 데라우치 를 도와 헌병경찰제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헌병경찰제의 정점 (頂點)에 있었던 인물이다. 아카시 는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 데 사용할 사냥개 50마리를 들여왔 다고 한다. 후쿠오카의 승립사(勝 立寺)에서는 이러한 그의 머리카 락과 손톱을 거두어 묘를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이들을 ‘공포정치 3인방’이라고 일컬었다. 데라우치 연출, 도쿠토 미(정치와 언론)와 아카시(군사 및 치안) 공동 주연, 피해자는 조선인 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나 라 일본에서는 존경 받고 지금도 추숭되고 있는 인물들이다. 데라 우치 마사다케에 대한 추숭은 그 와 그의 아들의 커다란 묘비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야속한 역사 의 이중성(二重性)을 엿볼 수 있다. 무단정치, 헌병경찰제 헌병경찰이란 문자 그대로 군 인 경찰인 헌병을 민간인 사찰의 경찰로 대치한 것을 말한다. 발언 의 진위는 알 수 없으나, 한때 데 라우치의 발언이라고 하여 다음 과 같은 내용의 글이 유포된 적이 있다. “조센징은 철저히 두들겨 눌러 야 말을 듣는다. 군대식으로 훈 련하여 정신없이 돌려야 통제 가 가능하다. 어설프게 내지식 (內地式)의 민주 방식을 사용했 다가는 오히려 기어올라 기강 이 엉망이 된다. 정치란 힘이다.  힘 있는 정치를 못하는 나라는  혼란이 있게 마련이다. 내 무단 으로 ‘센징[鮮人]’을 다스려 기 어코 메이지텐노[明治天皇]의  성은을 눈물로써 고맙게 여기 도록 만들겠다.” 헌병결찰제의 본질은 조선인에 대하여 군대식으로 통체하고 무단 으로 눌러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소위 ‘내지(일본)’와는 달리 가혹하게 다루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헌병경찰제는 ‘경술국치’ 이후 1910년 9월 10일부터 시행되었 다. 헌병경찰제에 의해 일본 헌병 사령관이 중앙의 경무총장이 되 고, 각 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이 되었으며, 위관(尉官) 이 경찰서장 · 경시(警視), 하사관이 경부(警部), 사병이 순사(巡査)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렇 다고 하여 종래의 경찰제가 없어 진 것은 아니었다. 헌병에 의하여 경복궁 전각을 철거한 자리에 들어선 조선물산공진 회 2호관의 모습 동양척식회사 건물(이상 필자 제공)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 선총독의 초상화(일본 위키 피디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