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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난지도 의병항쟁 1908년 들어 당진 일대에 항일의병 활동이 격력하게 전개되었다. 3월 9일에는 의병들이 당진 읍내에 들어와 박사원을 붙잡아 주민들 앞에서 밀정이라 하여 총살시킨 일이 있었다. 홍성경찰분서는 이 보고를 받고 3월 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된 경찰대를 당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소난지도가 의병의 근거지임을 확인한 경찰대는 1908년 3월 15일 오전 6시경 탈취한 어선을 몰고 소난지도 앞의 우무도에서 소난지도 상륙을 시도하였다. 의병은 경찰대를 향해 1시간여 사격을 가하여 한인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공격해 오는 경찰대의 상륙을 막을 수 없었다. 무려 9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탄약이 떨어진 의병대는 동쪽의 해안끝까지 밀렸으며 그곳에서 36명의 희생자를 냈다. 섬의 북쪽에 있는 동굴속에 있던 의병 5명도 살해되었다. 바다에 빠지는 등 행방불명된 의병도 50명에 달했다. 소난지도에서 일본 경찰대에 대한 공격은 잔인하였다. 심지어 선원과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 행위를 저질렀다. 소난지도 의병의 피해 소식은 곧장 수원에 있는 의병부대에 전달되었다. 3월 19일 저역 9시 수원지역 의병이 10척이나 되는 배를 타고 당진군 내명면 고항포(현 석문면 장고항)에 들어와 밀고자 색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소식은 서울에까지 전해져 『황성신문』에도 보도가 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 뒤 홍원식은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한 후 1910년대에 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하였다. 또 구국동지회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하였으며, 고향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4월 15일 제암리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순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