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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구현의병의 면천성 전투 최구현은 면천군 매염리 [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최구현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봉사(奉事)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군부(軍部) 참서관(參書官)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분을 억누를 수 없어 관직을 사임하고, 1906년 송악면 기지시리에 창의도소(倡義都所)를 설치하였다. 최구현이 의병을 모집하는 창의문(倡義文)을 게시하자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서 370여명의 주민들이 격문을 보고 모여들어 의병이 되었다. 최구현은 이곳에서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으로 추대되었고, 의병을 지휘하며 15일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위세를 드높였다. 최구현이 이끄는 의병들은 1906년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 경찰대와 치열하고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퇴각했다. 이후 의병 36명을 인솔하여 화성 창의소 홍일초(홍원식)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6월 7일에는 홍주성에서 패한 의병 차상길이 15명을 인솔하여 합류했다. 최구현 의병은 1906년 6월 18일, 홍일초 부대와 함께 면천성을 다시 공격하여 군수 이교영를 포박하고 이속(吏屬)을 난타하여 결전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했다. 또한 1906년 8월 중순에도 다시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거듭되는 최구현 의병 부대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관군과 일본 경찰대는 1906년 8월 24일, 의병의 본거지인 소난지도를 급습해 최구현을 체포했다. 최구현은 면천에 끌려와 일본 수비대의 심한 고문을 받고 플려났지만 1906년 음력 12월 23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최구현의 행정은 순국 이후 100년 가까운 기단 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최구현의 손자 최충목이 묘지석을 발견하면서 밝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