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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사랑방 • 제주도 대정 121 년(1840년) 9월 4일에 기록된 내 용처럼 조선 후기 선비이자 금석 학자, 문인화가, 서예가로 그 이름 을 중국에까지 떨쳤던 추사 김정 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제 주도 대정현 유배길에 올랐다. 여기서 ‘위리안치(圍籬安置)’란 죄인이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바깥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두던 일을 말한다. 추사는 탐관오리를 탄핵하다가, 임금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에 위리안치되 었다가 능지처참 된 윤상도(尹尙 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무려 9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해야했 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에 풀 려났다가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 배되어 모두 12년을 가족과 떨어 진 낯선 땅에서 살아야 했다. 14.7m에 이르는 대작 국보 ‘세 한도(歲寒圖)’를 그린 서예가이며 대학자인 추사는 제주도 유배 때 다리를 제대로 뻗을 수조차 없이 좁은 것은 물론, 거미와 지네가 기 어다니는 방 안에서 살아야 했다. 또 콧속에 난 혹 때문에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웠으며, 혀에 난 종 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추사는 화 가 날 때나, 외로울 때, 슬프고 지 치고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추사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 는 ‘세한도’도 이때 그렸고, 추사 체라 불리는 추사의 독창적인 서 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추사에게 는 유배가 힘든 시기였겠지만 결 코 추사는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 지 않았다. 추사가 위리안치되었던 ‘추사 유배지’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로 배치된 초가집 가운데 문간 왼쪽, 채 한 평이 될까 말까 한 좁은 방 안에 밀랍 인형 둘이 앉아있는데 이는 추사와 초의선사(草衣禪師) 다. 차를 마시는 이들의 모습을 바 라다보고 있자니 추사와 초의가 살던 18세기의 한 끝자락을 보는 듯 가슴이 아리다. 고향의 가족과 공적인 업무에서 배제된 채 유배 의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시 선비들 의 마음을 지금의 우리가 어 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추사의 고통스러운 삶을 버티 게 해준 이가 바로 초의선사 의순 (草衣 意恂, 1786~1866)이다. 유배지에서 오히려 삶의 향기 느 껴져 유배의 쓰디쓴 잔을 들고 있을 때 찾아와 준 벗, 그가 초의선사 다. 추사와 초의는 1786년생으로 동갑이다. 추사와 초의는 29살 때 서로 알게 되어 우정을 나눴고 추 사가 54살 때 제주로 유배돼 온 3 년 뒤인 57살 때 두 사람은 유배 지에서 기쁜 만남을 가졌다. 추사가 이곳 대정현에 유배됐 을 때 차가 없었다면, 아니 차를 보내주고 벗이 되어준 초의선사 가 없었다면 추사의 위대한 작품 들과 추사체는 탄생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추사가 살던 집주변에는 가시가 사나운 탱 자나무를 심어 철저히 외부와 차단해 놓았 는데, 이를 '위리안치'라고 한다. 추사의 ‘세한도’ 그림을 바탕으로 한 추사 관 전경(이상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