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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 것들 • 남한산성 121 ∼1896)은 이곳 남한산성에 의병 연합군이 주둔했다. 당시 『동경조 일신문(東京朝日新聞)』은 성안 의 병 1,60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1896년 2월 28일 남한산성에서 광주의병 · 이천의병 · 양근의병이 합세하면서 남한산성 연합의병을 구성하고 의진을 편성하게 된다. 주요 의병장은 김하락(金河洛) · 구 연영(具然英) · 김태원(金泰元)·신용 희(申龍熙) 등 이며 이들의 활약이 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조선군 친위대 1개 중대를 보내 산성을 공격토록 했으나, 남한산 성 연합의진에게 격퇴 당했다. 연합의진은 이후 서울진공작전 을 추진하지만, 좌익장 김귀성이 성 밖에서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 었다, 대장 박준영을 광주유수에 좌익장 김귀성을 수원유수에 임 명한다는 관군의 간계에 넘어가, 대장 박준영과 좌익장 김귀성이 관군에 매수되고, 3월 22일 새벽 서문과 북문이 열리면서 관군에 게 참패하고 말았다. 정미의병(1907∼1910)은 광 주지역 출신 남상목(南相穆) · 윤치 장(尹致章) 의병장이 활약한 시기 였다. 이처럼 남한산성을 중심으 로 의병들이 활동하는 등 대일무 장투쟁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자 일제는 남한산성의 광주군청을 경안동으로 이전시켜 버린다. 이 로써 300년간 군사 행정도시 기 능을 해오던 남한산성은 주민들 이 떠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다.(김하락 『진중일기』, 광주군지 1990) 그러고 보면 남한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천혜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 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 무왕 12년(672) 한산주에 쌓은 주 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 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 이기도 하고, 일제 침략기엔 항일 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수적 열세 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 고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우리는 위기 때마다 슬기롭게 국난을 극복하 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를 보 존해 왔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한 양대학교 행정자치대학 원을 졸업하고 석사학위 를 취득했다. 현재 시인 이며, 한국민족문화연구 소 소장, 대한민국순국선 열유족회 이사를 맡고 있 다. 2002년 공무원문예대전 시조 최우수상으로 등단했으며, 2004년 농민신문신춘문예 시조 부 문에 당선되었다, 「금강송아리랑」 · 「울진모내기 소리」 · 「태극기」 등을 작곡했으며, 음반 「전세중 창작가곡 34곡, 시인의 노래」, 「전세중 창작 동요 60곡, 태극기」를 발매하였다. 『어느 소방관의 이 야기』 외 14권의 저서도 냈다. 필자 전세중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