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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2024년 7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우리문화 사랑방 하게 나타나는데, 조선시대 초 기에는 약 2.0cm 안팎의 정교하 고 가는 주름을 잡았으나 17~18 세기에는 마치 기계로 잡은 듯한 1.0cm 정도의 주름이 나타나기 도 한다. 구름과 보배무늬가 품격을 더해 구름은 예부터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무늬로 주로 남자의 복 식에 쓰였다. 1746년에 조선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박일원이 펴낸 《추관지(秋官志, 형조의 소관 사 례를 모아 엮은 책)》에는 ‘조신의 장복(章服, 임금과 벼슬아치가 입 는 제복의 하나로 음양오행설에 따라 무늬를 수 놓는다)과 융복(戎 服, 조선시대의 군복)은 모두 구름 무늬를 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궤》나 《조선왕조실록》에 보이 는 관원의 집무복도 구름무늬 옷 감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실 제로 조선시대의 무덤에서 출토 되는 관원용 집무복과 철릭에는 구름무늬 직물이 많이 쓰였다. 구름무늬는 시대별로 구성과 형식에 약간의 다름이 보인다. 조 선시대의 구름무늬는 구름의 머 리 부분인 여의(如意)가 네 무리로 뭉쳐 마름모 형태를 만든다. 철릭 2000년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2011년 한국문화사랑협회를 설립하여 한국문화 를 널리 알리고 있다. 또한. 2015년 한국문화를 특화한 국내 유일의 한국문화 전문 지 인터넷신문 《우리문화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 으로는 《맛깔스런 우리문화속풀이 31가지》, 《하루하루가 잔치로세(2011년 문화 관광부 우수도서)》,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한국문화 이야기》 등이 있다. 필자 김영조 에는 구름무늬만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보배무늬를 넣 어 그 품격을 더해준다. 이렇게 원나라에서 들어온 외 래의 복식이었던 철릭은 점차 우 리나라 고유의 옷으로 자리잡았 다. 마치 조선 말 대원군이 청나라 에서 돌아오면서 입었던 ‘마괘’가 ‘마고자로’ 정착된 것과 마찬가지 다. 도입 초기에 융복 위주의 기능 에서 사대부 양반들의 관복, 하급 직이나 시민들의 평상복 또는 무 당 등이 입는 무복(巫服)으로 분화 되면서 입는 사람의 수가 자연스 럽게 늘어났다. 그 결과 철릭의 사 회적 지위는 점차 낮아지게 된다. 철릭은 옷감을 낭비한다는 지적 받아 《조선왕조실록》의 정조 17년 (1793) 10월 11일 기록을 보면 “근래 벼슬아치들의 공복(公服) 이 소매와 깃의 폭이 점점 넓어져 서 자못 옛날 제도에 어긋나고 심 지어 조례(皂 隷, 관아에서 부리던 하인)들의 철릭 소매도 따라서 넓 어져서 거의 온 폭의 비단을 쓰기 까지 하니 그 낭비가 민망할 정도 입니다. 이 역시 바로잡을 방도를 충분히 의논하여 공복의 소매와 깃을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르게 하고 조례들의 철릭도 되도록 짧 고 좁게 하면 옛 제도를 다시 찾고 비용을 줄이는 실질적인 효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철릭의 소매가 넓어져서 옷감의 낭비가 많아 개혁해야 한 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당시 상황 을 말해주고 있다. 또 순조 34년 (1834)에도 철릭의 소매가 발등 까지 끌리는 상황을 지적한 내용 이 보이는 것은 물론, 고종 20년 (1883)에 융복을 폐지하고 군복을 입도록 하면서 철릭은 우리 곁에 서 사라졌다. (이 글은 민보라 국립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구름 과 보배무늬 철력》을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