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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2월28일 금요일 12 (제218호) 기획 우리나라는삼면이바다이고태고(太古)적부터외세의수많은침공을받아왔다.특히고려말홍건적과왜구는수시 로침략하여도륙하면서 백성들은불안에떨지않을수없었다.그리고그때마다현명한장수가나타나지극한애민정신으로우리백성들을 지켜주었으니우리는이 들을명장(名將)또는현장(賢將)이라부른다.그리고이들은대부분문과에급제한문관으로무예또한뛰어나문무를 겸비하여선생(先生)으 로부르니고려말박인계장군을지칭(指稱)한것이다. 수차례에걸쳐왜구를토벌하였고,개성수복1등공신으로벽상공신에올라만년을편하게보낼수있었음에도80세 의고령에왜구와싸우 다말에서떨어져유명을달라하니애석케하지않은이없었다.이에선생의구국정신과높은도덕성을기리며소개해 본다. 선생의본관은함양이다.함양박씨는고려조에권 문세족의 전통을 이어간 명문가로서 고려조 예부상 서를 지낸 휘 선(諱 善)을 중시조로 하여 기일세(起 一世)하고있다. 상서공의아들휘인정은문과에급제하여조청대 부 예부상서이고 은청대부 추밀원사에 증직되었으 며그의아들휘신청(信淸)은문과에조청대부예부 상서 검교신호위 무덕장군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아들윤정은문과은청광록대부판호부상 서와 태부경을 지내다 금자광록대부지문하성사를 증직받았으니곧고조부가된다. 증조부신유(臣 찮 :1212~)로벼슬은태부경으로은 청광록대부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 추밀원사(樞 密院使:종3품)를 지내고 고려 고종 때 김경손 (金慶 孫)과 더불어 나주에서 초적 이연년(李延年)의 난 을평정한공을세워응천군(凝川君)에봉해졌으며 금자광록대부 상주국 (上柱國:정2품)판삼사사(종1 품)에추증되고충질(忠質)의시호가내려졌다. 조부의 휘는 지수(之秀:1244~), 충렬왕(1275-129 7)때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왕명의 출납과 군사의기밀을담당하던종2품벼슬)를지내고비의 어대 (緋衣魚帶)를 하사 받았는데 비의(緋衣)는 국 가에서 내려준 질질 끌리는 긴 옷이고, 어대(魚帶) 는 금은으로 장식한 물고기 모양의 부계(符契)인데 반을 갈라 왼쪽은 조정에 두고 바른쪽은 관명과 성 명을조각(彫刻)하여차고다니게되어있다.현부인 (縣夫人) 무송유씨(茂松庾氏)는 예부시랑 (禮部侍 郎:정4품) 무홍(茂弘)의 따님으로 3남을 낳으니 첫 째 제( )는 문과 정언이고,둘째 전(琠)은 지신사 (知申事)함양군(咸陽君)이다. 셋째는선생의아버지인휘우( 1268?~ )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2년(1310) 밀직사 대언(代 言:정3품)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판삼사사(判三司事: 정1품)에 추증 되었다, 충직한 신하로재추(宰樞:재부와중추원)에올라왕명을시 달하였고집에서는부모에효를다하였으며아들인 계의귀(貴)로추증(追贈)되셨다.어머니군부인(郡 夫人)경주김씨(慶州金氏)는판서천계(天係)의따 님으로 천성은 선량하고 성품은 부드럽고도 지혜가 있어, 부모가 그녀를 아꼈다. 15세에 시집와 시부모 의뜻을잘받들고존경하니시부모(媤父母)도며느 리를 딸자식처럼 사랑하고 예로 대우해 주었다. 증 조 김경손 (金慶孫:추밀원부사)은 고종24년에 전라 도지휘사 (全羅道指揮使)로 공의 증조부인 응천군 (凝川君)박신유(朴臣 찮 )와함께이연년(李延年)의 난을토평한분이다. 선생은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형들과 함께 우애가 좋았고 서로 두뇌가 뛰어나 경쟁하듯 학 업에 정진하며 앞 다투어 문과에 급제하니 이는 부 모 의 가 르 침 과 윗 대 조 상 으 로 부 터 대 대 로 내 려오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의 전통을 이어 받았 다. 공은 어려서 명석한 두뇌로 한번 읽은 것은 잊지 않았으며책읽기를스스로즐겨하고담담(淡淡)하 기 짝이 없었다.착한 심성은 어려운 백성이 보이면 서슴없이 돌보았고 돕고 나누는 어진 마음씨는 보 는 이들이 그 지성에 감복(感服)하여 모두가 자기 들이 미치지 못할 바라고 여겼다.평생 사람들과 잘 사귀어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힘을 다해 도와 주려 하였으며 일이 수습된 뒤 도와주는 것을 그쳤 다. 천성이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면서 공손하고 검소 하였으며, 신의(信義)가 있고 너그러우면서도 신중 하고엄숙(嚴肅)하였다.그는풍모가크고훌륭하였 으며 겉으로는 장엄(莊嚴)하고 정중하였으나 속마 음은관대(寬大)하고온화했다.동료선비들을만나 면 즐거워하며 지위(地位)를 가지고 차별하지 않았 다. 평소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여서 사냥을 가면 항상 잡은 것이 매우 많아,무부(武夫)들이 그의 능 력을칭송하였다. 공은 비록 문관(文官)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지 만 무관으로서도 훌륭하게 그 직을 수행하여 문 무를 겸비한 행정 관료였으며, 봉익대부(奉翊大 夫) 예의판서에 오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 졌다. 선생은 관직에 있을 때에는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법도를 지켜 한 터럭만큼의 용서도 없었으며, 아침 부터밤늦게까지게으르지않고분명하게일을처리 하니, 늠름하기가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사람 들이모두두려워하고공경하였다. 평상시 일을 할 때 한 번도 모나게행동하지 않았 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가 관대하고 후하며 속 이 넓고 덕(德)이 높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 나 많은 군사를 지휘하거나 큰일을 한 뒤에야, 그가 조그마한일에구애되지않고비범한도량을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려사1363년윤03월15일‘개경을수복한공신들 을 녹훈하다’조를 보면 선생의 활약이 드러난다. 이 는 흥왕사의 변으로 공민왕이 개경을 비울 수밖에 없었으나 선생은 개경을 수복하는데 1등 공신에 오 른것이다. 흥왕사의 변은 1363년(공민왕 12) 김용(金鏞) 이흥왕사의행궁에머무르고있던 공민왕을시해 하려고 한 사건으로,1359,1361년의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복주(福州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 3년 2월에 흥왕사를 시어궁(侍御宮)으로 삼고 그 곳에 머물렀다. 그해 3월 부원배들과 결탁한 김용 은 반원개혁정책을 시도했던 공민왕을 살해하기 위해 흥왕사에 그의 도당 50여 명을 보내 침범하 게했다. 이에 왕의 호위인원은 다 달아났으며 안도적 (安都赤)·왕자(王梓)·김한룡(金漢龍)·홍언박은 김용의 일당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최영(崔 瑩)·우제(禹 )·안우경(安遇慶)·김장수(金長 壽) 등이 서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반란을 평 정했다. 왕은 이인복(李仁復)·정찬(丁贊)·우제·홍선복 에게 명령하여 역적들을 순군(巡軍)에서 국문하 게 했으며 곧바로 흥왕토적공신을 봉록했다. 김용 은초기에는 반란군 진압에나서는등의행위로모 면했으나 그의 음모가 드러나서 곧 체포되어 밀성 (密城 :지금의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로 옮 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하면서 흥왕사의 변은 마무리 되었고,선생을 비롯한 찬성사상의(贊成事 商議)황상(黃裳),정당문학(政堂文學)한방신(韓 方信),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밀직 사(密直使) 최영(崔瑩),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구수(李龜壽),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박 춘(朴椿)등53명을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삼아 〈공신각의〉벽 위에 그 초상화[圖形]를 걸고,부모 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봉작(封爵)하며,그 아들 1 인에게는 7품의 관직을 주되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사위중1인을8품관원으로임명하였다.구 사(驅史)는 5인, 진배파령(眞拜把領)은 7인으로 하였고, 초입사(初入仕)를 허용하고 자손은 음직 (蔭職)으로 서용(敍用)하였으며, 토지 100결과 노 비10구를하사하였다. 우왕 원년 10월(1375)에 왜구가 연해를 침략하여 주군(州郡)이 소연(騷然)함에 양광도안무사(楊廣 道按撫使)정비(鄭庇)와순문사(巡問使)한언방(韓 彦邦)이왜(倭)를막지못하자헌부(憲府)에서탄핵 하여수졸(戍卒)로강등시키고공이그때예의판서 (禮儀判書)로 양광도원수(楊廣都元帥)를 겸하고 있어 출정하여 11월에 왜적의 배 2척을 붙잡아 섬멸 했다. 1376년 07월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로 속현(屬 縣)인 회덕현(懷德縣)의 감무(監務) 서천부(徐天 富)가 〈박인계를〉 구원하러 출동하지 않았다는 이 유로그를참수하였다.적이다시석성(石城)을노략 질하고 이어 연산현(連山縣) 개태사(開泰寺) 쪽으 로 치닫자 선생이 맞아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져 전 사했으며 적은 개태사를 짓밟아 버렸다. 박인계는 평소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당시 어진 장수로 일컬어졌다.고고려사에전한다. 그리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 장군은 선생이 싸움에서 패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왜구를 칠 것을 청하였다.우왕(禑王)및 여 러 장수들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그만두게 하 였으나최영은말하기를,“하찮은저왜적들이방자 하고포악하게 구는것이이와 같으니,지금의때를 잃고제어하지않는다면이후에는도모하기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만약 다른 사람으로 장수를 삼는다 면 반드시 제어하여 승리할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 다.그리고 군사들이 평소에 훈련되지 않아 또한 쓸 수도 없습니다.신은 몸은 비록 늙었으나 뜻은 쇠하 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경성을 지키고자 할 따름이니, 청하건대 휘하의 군 사를거느리고빨리가서그들을치기를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청하기를 2~3번 하기에 이르자 이를 허락하니,최영은잠도자지않은채떠나왜구를물 리쳤다. 최영장군이분개하며출정하게된것은흥왕사의 변을 공과 함께 제압하고 나란히 경성수복공신1등 공신이 된 인연과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 자신이 발원문을 지은 만큼 고려 왕조 내내 왕실의 존숭을 받았고, 태조 왕건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특별한 사 찰이기 때문에 왜에 의해 도륙되는 것을 참지 못하 였다고사료된다. 선생은평일에융적(戎賊오랑캐)을제압하는데 계책(計策)을세워최선(最善)을다했고그때마다 결단(決斷)을 잘하여 앞에 강적(强敵)이 없었고 군정(軍政)은 간결하면서도 법(法)이 있고 위엄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기 때문에 사관(史官)은 말하기를 【박인계는 본디 민심(民心)을 얻어 당시 에 양장(良將)으로 일렀다 했고: 素得民心 時號良 將】선생의 죽음이 알려지자 국내외(國內外)가 크 게 놀랐다고 했다. 슬프다 공이 작고한지 얼마 안 되어 고려가 망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공의 훈업 (勳業)과 절의(節義)가 그렇듯 우뚝함에 마땅히 조정에서시호(諡號)와증직(贈職)의은전이있어 야 할 터인데 국가 다난(多難))한 때를 당하여 마 침내 나라가 바뀌었으니 어찌하겠는가? 개탄(慨 嘆)할일이다. 선생은 군부인 모(某,성 실전)씨와의 사이에 1자 (子) 2서(壻)를 두었으니 아들 원렴(元廉)은 문과 (文科)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호부 상서(戶部上書)요.배는 군부인 영천이씨이며 군기 소감(軍器少監), 사재령(司宰令) 휘 분(芬)의 따님 으로공과함께흥왕사토적공신(興王寺土賊功臣)1 등이다. 첫째사위는판서문화유씨유홍,둘째사위는판서 안동권씨 권엄이다. 손자 덕상(德祥)은 문과급제하 고 정순대부(正順大夫) 부사(府使), 증(贈) 이부상 서(吏部尙書)이며 배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상 원최씨(祥原崔氏)이다. 증손 습(習)은 문과에 급제 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이니 조선 태종(이방원) 과 함께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고 21인 갑계원(甲契 員)이다. 선생은 문과에 올랐으면서도 무인으로 생을 마쳤 다.이에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 다. 선생이 태어난 전후시기를 살펴보면 고려 말 무 인(武人)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서 비롯되었 던무신정변(武臣政變)은100년간(의종24년 1170~1 270) 지속되었고 소수의 고위 무신들과 일당(가문) 이 정권을 농단(壟斷)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과정 이지속되면서고려의정치·경제·사회등모든면이 크게 동요, 변질되는 변혁기였다. 그런데 이 무신정 권이채끝나기도전에대륙북방의몽고족(蒙古族) 이 침입하여 고려는 수십년간 전쟁을 치르며, 끝내 는 그 들에 복속되어 다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14세기후반에공민왕이즉위하여반원개혁정치(反 元改革政治)를단행하지만생각만큼의성과를거두 지못하였다. 한편, 북으로는 홍건적(紅巾賊)과 몽골의 잔당들 이 수시로 공격해 오고 있었고 남으로는 왜구의 잦 은 침범으로 최악의 피해를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양왕 4년(1392)에 고려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고려후기로일컬어지는이시기는변혁과 고난의시기였다. 고려는 고종 18년(1231)부터 몽골의 침략을 받아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인 뒤 고종 46년 (1259)에 강 화(講和)를 맺었고, 그로부터 공민왕 5년(1356)에 반원운동(反元運動)이 성공할 때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다. 여원관계 (麗元關係)는 부마국체제(駙馬國體制) 가 성립되면서 원간섭기(元干涉期)가 시작되었고 지배세력은 어느 정도의 정치·사회적 안정을 찾으 며 재편성의 길을 걸었다. 재편성된 지배층으로 고 려 후기 세족(世族)층은 지주층(地主層)으로 경제 적기반을갖고조정에서활동하면서지속적인관료 배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혼인관계 등을 통하여 문벌(門閥)을형성했다. 고려시대에서 혈연관계를 보여주는 성관(姓貫) 과 가문(家門)은 혈연적 요소와 더불어 사회신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신분배경은 많은 것을 시사 (示唆)하였다 특히,妻系·父系친족의위치가매우중요했기에 가문의사회적지위가통혼권(通婚圈)에서잘드러 난다. 곧 고려사회에서는 가문과 문벌의 지위가 본 인의 정치적 출세 및 경제적·사회적 지위 결정에 중 요한요건이되었다. 관인층은 文班·武班·南班의 세 계층으로 구성되 며 고려의 귀족을 대표하였다. 즉 문반층은 문관직 을,무반층은 무관직을,그리고 남반층은 궁중직(宮 中職)을세습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려는 지방에 서 성장한 호족(豪族)들이 대부분 관인층을 형성 하였고, 그 관인층은 서로 다른 姓을 갖은 사람들 로 구성된 이성귀족(異性貴族)으로 본래 출신지 를본관(本貫)으로갖게되었다.즉,자기들의가문 을 다른 가문과 구별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귀족들 의특권의식(特權意識)의발로(發露)였다.그들은 중앙(開京)에서 관직에 진출하고 그 자식들도 역 시 중앙의 관직에 나아가는 일을 세습적인 직업으 로삼았다. 무신정변후에는문반관리(文班官吏)의무직대유 (武職帶有)가많이나타났다.곧무반출신으로서,문 반만이 임명되었던 사관직(史官職)과 농부직(濃部 職)을 겸하였고,또한,문반출신으로 무반직인 상장 군을겸하게된다. 선생의집안도고려후기의족보(族譜)에서그예 를찾을수있으며특히,공을비롯한신유(臣 찮 ),지 량(之良),양계(良桂),습(習)등이문반출신으로상 장군을겸임하였고,모두문재(文才)가있고유학에 뛰어나서 유관직(儒官職)과 무관직(武官職)에 고 루 등용되면서 당대의 명문출신 권세가였다. 특히 문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문의 구성원들이 인사 담당자 및 과거시험 주관자와 인척 관계를 계속 맺 었다는점등이상당한작용을했다. 선생은 함양군(咸陽君)으로 봉군(封君)된 고려 말 문관이면서 무장으로 백성들에게는 인자한 관료 로 덕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정을 주었고 전쟁터에서는 상하관계(上下關係)를 뚜렷 이하고철저한군율(軍律)을지키며승리를거듭했 다. 사관이 말했듯이 【박인계는 본디 민심(民心)을 얻어당시에양장(良將)으로일렀다했고:素得民心 時號良將】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슬퍼했 고국내외(國內外)가크게놀랐다고했다. 전장에서는 상하복종의 군율을 지키기 위해 양광 도원수(楊廣都元帥)를 맡아 속현(屬縣) 회덕감무 (懷德監務) 서천부(徐天富)가 달려와 아군을 구출 하지 않았다고 그를 참수(斬首)하였다고 기록한데 서 엄격한군율을 지킨것을볼수있어,군졸과 장군 들은모두섬뜩하였을것이다. 어려서 말 타기와 활쏘기를 즐겨하여 문관이면서 도 전장에서는 훌륭한 무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경성수복1등공신(京城收復一等功臣)으로 녹훈(錄 勳)되었다. 이는 공신집안으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고 위세를 떨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삼남연안으로빈번하게침범한왜구의잔 혹함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는 선비정신이 있었기 에 홀연히 나가 연산 개태사에서 80세 노구를 이끌 고 전장에 나가 말에서 낙마하여 생을 마감한 것은 참으로애석한일이다. 선생의 집안은 신라시대부터 대대로 내려온 권문 세족으로 벌열(閥閱)한 집안이었다. 많은 사료들이 멸실(滅失)되어글을쓰면서무척힘들었고역사서 인 고려사, 고려사절요와 고문서, 고문집을 통하여 공과관련된사료들을조금밖에찾을수없었다. 고려사회에서는 가문과 문벌의 지위가 본인의 정 치적 출세 및 경제적·사회적 지위 결정에 중요한 요 건이되었고,혼인관계도관료배출못지않게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가문 간통혼을통해인맥을형성하고지배계급으로유지 발전하였기때문에혼맥(婚脈)을이룬집안족보를 이용하여찾는데주력하였음을밝혀둔다.아쉽게도 공의 배우자 성씨를 찾기에 주력하였으나 끝내 못 찾아안타깝다. 선생의 선조들은 무신정변 100년간은 은거세족 (隱居世族)으로 정치기구 참여에 소극적 이였으나, 무신란 이후 6촌 내외 선조들이 문과에 대거 급제하 면서 지속적인 관료 배출과 정치기구에의 적극참여 는 세족 층이 문벌로서 지위를 유지해 나가는데 있 어가장중요한요소였다. 시조 상서공부터 善-仁挺-信淸-允楨-臣 찮 로 이어지는 선조가 개경에서 상서(尙書)이상의 벼 슬하며 문벌귀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일이다. 고려시대 혼인제도는 솔서제(率壻制) 즉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혼인초기에는 모든 생활을 처가에서 하며 “밥 한 술, 물 한 모금까지 도” 모두 처가에서 해결하였다고 『이규보 동국이 상국집』에서 밝혔듯이 우리 선조들의 어린시절은 외가에서 훈육되었기 때문에 외가의 사회적 정치 적 지위와 배경은 그만큼 중요하였다.결국 가문간 통혼은문벌귀족간상호이해가필요했을것이다. 증손자 박습(朴習)이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관 찰사(觀察使)에 부임하여 고향 경남 안의에 금의환 향하여 마음대로 산수에서 노닐다가 안음(安陰)에 정사를짓고원당으로지목하였으니이는증조부함 양군(咸陽君휘인계)의원혼을달래기위한원찰로 장수사(長水寺)가 창건된 것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세시마다원혼을달래기위해제를지냈다. 충남연산에서는민심을얻고어진장수였던고려 원수 박인계의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0년 12월 3일 연산, 은진, 노성, 향교 유림과 공의 후손들에 의해 연산중학교뒤에박인계토왜순국기적비(討倭殉國 紀蹟碑)를세웠다.기적비일부내용을적어본다. ‘오호(嗚呼)라 우리 군사가 마침 내 분발하여 용 맹을 떨쳐 추한 무리들을 격퇴하여 다시 사직(社 稷)을 편안하게 한 것은 어찌 공이 한번 죽어 격동 (激動)케 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난이 진정된 뒤 공의 마을에 정문을 명 하여 충절(忠節)을 표창했 다.’ 이처럼 선생의 생애는 지극한 애민정신과 국가에 대한충의(忠義)정신에서비롯되었음을알수있어 지금 이 시대에도 귀감이 되고 있어 그 고귀한 정신 이우리의정신세계를맑게할것이다. /박성호명예기자(함양박씨대종회종사연구위원장) 개태사에서왜적과싸우다피살된현장(賢將)박인계(朴仁桂)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家系) 박인계선생묘소. 순 국기적비,연산중학교뒤 고려사,박인계선생을함양군에봉한기록. 고려사,벽상공신에오른기록. 선생의생애 벽상공신에오르다 양광도안무사 로개태사에서전사하다 선생의삶과시대적배경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