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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9월30일 월요일 12 (제213호) 기획 승정원일기는우리나라국보제303호(1999.04.09지정)이다.유네스코가지정한세계기록유산에등재되었다.이같이 세계적유산인승정원일기는자칫 끊어질위기에처했다.1744년(영조20)10월13일에승정원의화재로‘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모두소실된것이다 .그러나다행스럽게도인조원년 부터16년간의기록이의곡공박정현의일기에의해보수된것이다.승정원의화재로승정원일기가소실되자2년뒤 인1746년(영조22)5월에일기청(日 記廳)을설치하고인조시대에보수했던전례에따라‘승정원일기’를개수하는데주서(注書)를지낸인물들이남긴공 사(公私)의문서를널리구하였다. 이때후손에의하여가문에소장하고있던‘박정현일기’가일기청에제공되었고,그중에서인조원년(1623,계해)4월 28일부터1638년10월22일까지10 60일동안에1087건에해당하는기사를가려뽑아승정원일기탈초본(承政院日記脫草本)을작성하고사건말미에[以 上故判書朴鼎賢日記]라고출처 를명백하게밝혀놓고있다.이처럼국가적중요문서의기록이전해지게한의곡공박정현선생의생애와승정원일기 의개수등의과정을시조시인황 곡박영록선생이편저(編著)한의곡유문(義谷遺文)을통해소개해본다.선생은 신라경명왕의 적장자 밀성대군의 후예이 다. 그 후예 중 드러난 인물이 많으니 곧 고려 때에 휘 현(鉉)은규정(糾正)을거쳐삼품에이르렀고,문유 (文有)는급제로발탁되어전리좌랑이되었고,사경 (思敬)은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으로 전법판 서(典法判書)였다. 침( )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의판사(典儀判 事)에 올랐으나 1392년(공양왕 4) 7월에 이성계(李成 桂)가 거사를 도모하여 새 정부 조선국(朝鮮國)을 개 국하여고려조의국운(國運)이끝나자공께서는이왕 조(李王朝)섬기기를부끄럽게여기고불사이군의충 절을보인두문동72현중한분으로선생의8대조이다. 7대조 강생(剛生)은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 學),수원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를지내고함경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있을 때 졸(卒)하시었다. 명 문장가(名文章家)로 배불론(排佛論)을 저술한 바 있으며 자손들에게 전하는 장문(長文)의 유서(遺 書)가전해져온다.훗날1424년(세종6)에공의따님 장의궁주(莊懿宮主)가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들어 가귀인(貴人)이되자의정부좌찬성에증직되고밀 산군(密山君)에책봉(冊封)되었다. 6대조절문(切問)은문과에급제하여권지교서(權知 校書)정자(正字)에제수되었으나석달뒤인그해7월 2일에하세(下世)하였으니훗날에공의둘째아드님중 손(仲孫)이귀(貴)하게됨에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밀산군(密山君)으로봉군(封君)되었다. 5대조 중손(仲孫)의 자(字)는 경윤(慶胤)이며 호 (號)는 묵재(默齋)또는 백당(栢堂)이라 하였다.세 조 때 정란공신(靖亂功臣)에 책명되고 밀산군에 봉 해지고벼슬이의정부좌참찬이었고,사후에세조는 경순사상왈공(敬順事上曰恭)이요자혜애친왈효 (慈惠愛親 曰 孝)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부조지전 (不튐 之典)을내려제사토록했다. 고조부존성재공미(楣)는예조참의,증조부광영 (光榮)은형조참판으로밀성군에습봉되었다. 조부 부정공 이(苡)는 증 찬성이며, 이분이 좌참 찬 휘 호원(好元)을 낳으니 곧 아버지이다. 자는 선 초(善初)이며 호가 송월당(松月堂)이다. 호조판서 (戶曹判書),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훗날 에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송월당공파(松 月堂公派)의파조(派祖)다. 광주의대성인찬성(贊成)김명윤(金明胤)의따님 과혼인하여1562년(명종17)5월24일선생을낳았다. 선생의 휘는 정현(鼎賢)이요 자는 중노(重老)이 고 호는 의곡(義谷)이다.4형제 중 막내로 어려서부 터단정하고과묵하며행동에법도가있어사람마다 삼공(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四輔) 사보[四輔, 전의(前疑)·후승(後丞)·좌보(左輔)·우필(右弼)로 군주의 좌우에서 보필하는 신하)]로 기대했고 효우 하는 행동과 돈목하는 의리는 천성에서 우러났으며 평소생활에경솔한언동이나서두른기색이없었다. 1584년 (선조17,甲申)에 아버지 상을 당해 3년 동 안여막에서거처하면서상례를극진히집행하였고, 1588년(선조21,戊子)여름에선조께서실시한알성 시(謁聖試)에서후에정승이된추포(秋浦)황신(黃 愼, 1562~1617)이 일등이었고,선생이 삼등이었으니 당시에인재얻었음을모두하례하였으며,승문원에 선발되어들어갔다. 1589년(선조22)에문신들의정시(庭試)에장원을 차지하였고, 또 화어(華語)를 친시(親試)하였는데 또 선생이 으뜸이 되니 많은 상을 받았으며 모두 영 광스럽게 여겼다. 이어 세상일이 크게 변함을 만나 괴원(槐院,외교문서를담당한관청)에오래머물러 공의가 겸연쩍게 여기게 되어 예(例)대로 정자(正 字)와저작(著作)에승진되었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임금이 창 졸간에 평양으로 피난 갈 때에 고관대작들도 미쳐 호가(扈駕)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선 생이 낮은 산관(散官)으로서 또 대부인(어머니)이 오래된 고질의 병이 있는데도 사정(私情)을 돌보지 않고분연히일어나산을넘고물을건너서대가를따 라가니 길에서 주서(注書)를 제수하였다. 평양에 이 르러 대부인이 산골에 피난하여 병이 위급하다는 소 식을 듣고 선생이 울면서 정원의 전후사정을 말하고 나왔는데며칠이안되어중간에서부음을들었다.마 침사관두세사람이동시에임금의수레를따르지못 한일이발생하자말하는자들이정세의경중을알지 못하고 일률적으로 파직으로 논죄하게 되어 여러 사 람들이그들을원망하며억울하다는사람이많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선생께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울면서 정원(政院)의 동료들에게 사정 을말하고잠시나오느라사초를챙겨대가(大駕)를 따르지 못한 일을 두고 동료가 농담으로 던진 말 한 마디가 와전되어 초책(草冊)의 유무(有無)에 대해 서는 확인도해 보지않고,대간들의 탄핵을받은 것 이다.(사초분서의오명과박정현일기태동참조) 1599년(선조32)에 다시 저작에 서용되어 박사에 승진되었으며, 1601년(선조34)에 전적(典籍)이 되 었다가 얼마 뒤에 예조좌랑에 옮겨졌다. 당시에 훈 련도감이 신설되어 낭료(郎僚, 각 관아의 당하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의 자리는 한때의 재망으로 엄격 히 선발하였으며, 좌군(佐軍)은 더욱 중요하였는데 선생이여러해를겸임하여현저한성과를이루었다. 1602년(선조35)에예조와공조정랑으로승진하였다. 1603년(선조36)에는외직으로나아가영광(靈光) 을다스릴때에관리는단속하고백성에게는너그럽 게 하여 온 고을이 편안하였으며, 임기를 마치자 감 사(監司)는 최고의 등급으로 포상하고 조정에 아뢰 어유임을청하였다. 1608년(선조41)에 교체되어 돌아오니 군민들이 비(碑)를세워영원히그덕을칭송하였다. 사도시(司 寺, 궁중의 미곡과 장류 등의 물건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정(正)에서 승 문원의판교(判校)겸춘추관편수관으로옮기고영 건도감(營建都監)을찰임(察任)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여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의 품계에승진하였고,1612년봄에는영건(營建)의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승진하고가을에체직되어돌아 왔다.당시 국가에서는 균전(均田)의 일로 어사를 파견 하되 알맞은 사람을 엄격히 가려서 제수하였는데 선생 이호서지방의임무를받아유능하다는칭송을받았다. 1613년(광해군5)가을에연안부사에제수되었고, 1616년에임기를마치고조정으로돌아와강원도관 찰사겸순찰사에발탁되어제수되었으며,1617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북경 에갔다가1619년에돌아와좌윤이되었다.본래재략(才 略)이 있는 터이므로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을 겸임 하였고,겨울에는충청도관찰사겸순찰사가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事)겸비변사당상관이되고,여름에좌윤이되었 으며,1623년공조참판이되었다가겨울에비변사의 견책으로파직되었다. 1623년 4월11일(광해군 15년음력 3월12일)인조 반정 직후인 4월 28일(정해) 석강에서 문관에게 시 사를보이는문제등에대해논의할때에“새로운정 치의 초기에 학행이 있는 자를 특별히 발탁하여 기 용했습니다만,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들도 필시 많 을 것입니다. 팔도의 방백에게 하유하여 각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천발(薦拔)한 뒤에 전계(轉啓)하 도록 하되, 조종조의 고사대로 하소서.”라는 일이었 는데,답하기를,“이일이매우좋으니,시행하면괜찮 겠다.”하였다.이는인재등용으로더낳은정치를구 하자는것으로선생의혜안또한뛰어나다하겠다. 1624년(인조2)에 다시 서용되어 호군(護軍)이 되었 고,이괄의난에는공주로왕을호가하였다가환도한뒤 가 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되었으며, 가을에 담양부 사가되었으나얼마안되어파직을당하여돌아왔다. 1625년 여름에 사은정사(謝恩正使)에 차출되어 자 헌대부(資憲大夫, 정2품)로 특승 되었는데 당시 요동 으로 가는 길이 막혀 바닷길로 북경을 가야 했으므로 사람들은모두기를뜨고면하여하였으나선생은명을 받고태연하게기쁜듯조금의난색도보이지않았다. 1626년(인조4)에 돌아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강화도로 호종하였고, 이 해에형조판서(刑曹判書)에제수되었는데체직되면 다시제수되기를세번이나하였으며,1628년지의금 (知義禁)과도총관(都摠管)을여러번겸하였다. 1631년(인조9)에선생의나이칠십에관례대로기 로소(耆老所)의 당상이 되어서는 조참과 공회에 정 성껏 참석하고 부지런히 당시 기로소의 구신(舊臣) 들이모두선생의건강을부러워하였다. 1634년(인조12)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 었고,1635년에임금이문묘에석채(釋菜)를지낼때 에선생이종재(宗宰,왕의친족및외척과재신을아 울러 이르는 말)로서 종일토록 입시하고도 아무 탈 이없었으나이튿날갑자기풍담(風痰)에걸렸다. 부인이 여러 달 병간호를 하다 보니 근심으로 초 췌하여 걱정과 피로가 병이되어,1636년(인조14)여 름에 먼저 돌아가니, 선생은 병중에 애를 태워 병이 더욱 깊어졌다. 이해 겨울 임금이 서울을 떠날 때에 행차를 호가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싣고 영남으로 피난하면서 상소를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였으나 임 금이좋은말로답하며허락하지않았다. 1637년(인조15, 丁丑) 5월 25일에 산청군 단성에 서 임종하니 향년 76세였다. 그때는 난리를 겪은 뒤 인지라모든일이새로시작되는어려움에서도임금 이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니 실로 특별한 대 우였다.9월에 양주 인장리의 후부인 김씨의 무덤으 로반장하였으니이는유명(遺命)을따른것이다. 선생은 처음에 한성판윤 조수곤의 따님인 김제조 씨에게 장가들어 4녀를 두었으며 정부인에 추증되 었고,뒤에고려시중대유(大猷)의후예인영의정에 증직된 급(汲)의 따님인 청풍김씨에게 장가들어 정 부인에 봉해졌다.부인은 명가에서 생장하여 정숙하 고 유순하여 군자를 섬김에 어김이 없었고, 여러 어 린아이를 이끌고 어루만지기를 자기가 낳은 것같이 하였다.모두2남7녀가무리지어많은데도지극한정 성으로자녀를거두어교육과양육에소홀하지않았 으며, 손수 길쌈도 하여 부지런히 가사를 돌보아 있 고없는것때문에선생을혼란하게하지않았다. 1647년(인조25)에이르러아들안제(安悌)가원종 공신(願從功臣)이되었으므로좌찬성에추증되었다. 1592년(선조25, 壬辰) 4월 30일에 왜란을 당하여 임금이 서북쪽으로 피난할 때에 주서(注書)의 신분 으로임금의침문(寢門)을잠시떠난일로말을전하 는 자들에 의하여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쳤다’는 오 해를받아파직되었다.본래의순정(純正)한사실이 그대로 평가되지 아니하고 곡해되어 사첩(史牒)에 남아 후세에 전해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 후 동지사 서장관에 의망(擬望)할 때 당여(黨與)들 이제척하자이조참판겸춘추관기자헌(奇自獻,156 2~1624)은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정주(定州)에서 먼저 의주(義州)로 갈 때 주서(注書)와 한림(翰林) 이 싸서 둔 것을 홍진(洪進)이 싣고 와서 신이 받아 가지고정원(政院)에두었는데이일이잘못전해져 서사실이왜곡되었습니다.”라고하였다. 또상소에서“대저사초(史草)는사관(史官)이가 지고다녀야 하는데,떠날때에 직접가지고 가지않 았다 하여 확인도 해보지 않고 신이 휴지를 태운 것 을 인하여 지나친 농담이 참말이 되어 사초를 불태 웠다 운운한 일은 사실 애매하기 때문에 감히 무릅 쓰고곡절을전달합니다.”하였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살펴보면, 무심코 던진 농 담이 역사적 사실로 왜곡되어 오명을 남기게 되었 고,이로인하여고귀한학덕이그늘속에묻혀긴세 월을 유주지탄(遺珠之歎)으로 보내다가 세상이 바 뀌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정원(政院)에서 일어 난 임금의 거동과 관련된 일체의 행사와 경연(經 筵), 상참(常參), 차대(車對)와 같은 임금이 신료를 인접할 때 주고받은 말은 물론 국가 경영의 전반에 관하여보고들은사건들을빠짐없이꼼꼼하게기록 하여남겨놓은것이곧박정현일기이다. 승정원에 보관되는 일기는 입직 승지가 관리하는 것이원칙으로되어있으나,승지의교체가있거나유 고로 인하여 입직이 제대로 인계되지 않으면 서리에 게 맡겨져서 관리가 소홀해져서 일기의 일부가 유실 되거나도난을당하기도하였다는기록을볼수있다. 사례를살펴보면 ①세조때의환지(還紙)의이익을얻기위하여남 녀 지장(紙匠)들이 훔친 일(세조실록 권40. 12년 11 월 17일 을유 조 참조) ②임진왜란 이후 인조 원년까지 32년간의 일기가 이괄의난때에대부분유실되었고, ③순조때도22년6월분과10월분이유실되고4권 을도난당한일도있으며, ④정조연간에도10월6일망후(望後,음력보름이 후)분이유실된일등이있다. 일기의 수난은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 200년간 보존되어 오던 일기는 모두 소실되었고,임 진왜란 이전의 일기는 시기가 오래되고 전란기간이 길어복구하지못하였으나임진왜란이후일기는승 정원 서리 홍덕린이 26권의 일기와 광해군 시대의 조보 전부를 구한 덕분에 이괄의 난이 끝난 후 각사 등록과 주서를 지낸 사람들이 갖고 있던 당후일기와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사료들을 수집하여 1592년 임 진년 이후부터 소실 전의 1796권이었던 일기를 자료 의미흡으로548권으로축소시켜개수한전례가있다. 그 이후 120년간의 일기는 승정원에서 잘 보관되 어오다가영조20년(1744)10월13일에승정원의화 재로 인하여 소실된 것은 선조 25년(1592)이후부터 경종 원년(1721년)이후부터130년간의 1,796권으로 1년평균13.81권이었다. 정원의화재로소실된일기를개수하기위하여영 조 22년(1746) 5월 신미(辛未)일에 일기청(日記廳) 을 설치하고 15명의 낭청(郎廳)에서 45명으로 늘리 고 이를 3방으로 나누어 한 방에 15명씩 한 사람 당 2 년씩의분량을분배하는절목을세워소실된일기를 개수하기 위하여 인조시대에 보수했던 전례에 따라 조보(朝報)와각사등록및주서를지낸인물들이남 긴당후일기등공사의문서를널리구한결과, ①시강원에서 역대의 춘방일기와 조보 10여 바리 를 찾아내었고, ②의정부 육조 대간 홍문관 등 각사 의 등록 및 공문서,③지방에서는 은진의 이상인,공 주의양순몽,장단의윤헌주,지평의윤생원,나주호 장가의 문서 및 남양 홍감사 집안의 은대일기 ④사 가문서로소현세자의심양일기,이원익의완평일기, 이귀의연평일기,박정현의박정현일가일기등이있 고,⑤진연(進宴)에참고하기위해반출되어화재를 면한 숙종 31년의 1권과 45년의 2권을 찾아내었고, 화재 현장에서 불에 타다 남은 신여일기 중에서 온 전한것31권이발견된것은다행한일이다. 일반적으로일기란자기생활의기록을말한다.일 기를쓸때는하루의일중에서가장인상깊은일이 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나 의미 또는 교훈이 나 반성의 뜻을 발견하여 글감을 정해서 일기에 담 아쓰며,감상을곁들여쓰는비공개적인글이다.원 래 일기가 가지는 특성은 형식과 내용에 제약을 받 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로 훗날 자기 자신이 읽을 목적으로 쓰는 자기 고백적인 글이기 때문에 남에 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닌 비공개적인 글이기 때문 에 글의 내용에 따라서 실용문 이거나 문학적인 글 이었을것이다. 우선일기청(日記廳)에서승정원일기의개수지침 에 따라 시기가 오래된 선조, 광해군 두 임금 대의 사료는 인멸되어 보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제외하고, 이괄의 난으로 없어진 자료를 구할 수 없었고,1623년 인조 원년부터 1721년 경종 원년까 지 99년간의 일기를 개수하기로 원칙을 정하고 승 정원일기의 첫머리인 반정관계기사는 실록에서 그대로 옮겨 온 것이며, 1624년(인조2) 갑자년의 일기는 아예 없고 원년에서 3년으로 건너뛰어 일 기를작성하고있다. 그 가운데에서 박정현일기의 기사를 전사(轉寫)하 여개수한1623년(인조원년)계해(癸亥)4월28일부터 1638년(인조16)무인(戊寅)10월22일까지16년동안의 개수된1060일간의승정원일기탈초책에는기사말미 에 “모두 고 판서 박정현의 일기에 등사된 조보에 의거 함”라고명백하게밝혀놓고있어특수목적에충실한 공적문서로작성되었기때문에일기속에포함되어있 는개인적인일상생활에관한기사는모두제외되었다. 거기에다 대부분의 기사는 조보(朝報)나 각사등 록(各司登錄)에서 등출(謄出)하여 이를 기본으로 삼아소실된‘승정원일기’1,796권중에서개수된548 권은 3분의 1도 못 미치는 분량과 기사의 감축과 탈 락이 많았음을 감수하고 완전한 원상회복은 아니었 지만 1747년(영조23)정묘(丁卯)11월 갑진(甲辰)일 에공역을마쳤다.이때의개수관계는일기청등록에 그시말이전부나타나있다. 선생은천성이고요하여벗과사귀어놀기를좋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여 세상에 뜻이 없는 것 같았으나 영민하여 재주가 빼어나고 재간과도량이준엄하여일을당하면여유롭게처리 하여 오차가 없었다. 나아간 관직에선 모두 치성이 있었으니세상의기회를엿보면서자신을아끼는자 들과는비교할바가아니었다. 역사적인 기록인 사기(史記)의 중요성은 새삼 거 론하지 않아도 중요한 기록이다. 그럼에도 화재로 소실되어 일정기간이 누락되어 전해 온다면 역사적 인가치가떨어지게된다. 승정원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2001년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승정원일기 또한 화재로 일 정기간이 소실되었으니 인조 원년(1623년)부터 인 조 16년(1638)까지의 1060이간에 7,099건의 분량 중 에서1,087건이박정현일기를인용한것이니선생의 삶이더욱빛이난다. 선생의예장제문에“부고가조정에들리니,내가 금에놀람을더했다.”라고전해진다.이또한선생이 관직에 있었던 49년의 행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기 에놀라지않을사람어디있을까. ‘박정현일기’ 조선시대 인조연간(仁祖年間)의 국 정전반(國政全般)에 관한 양상(樣相)을 분위기까 지 조감(鳥瞰) 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자 조선중 기에 관해 문중사(門中史)나 가족사(家族史) 등 사 적연구(史的硏究)를 위한 중요한 자료(資料)로 전 해지고 또 요긴하게 쓰여 질 것이기에 그 가치 또한 높다할것이다. [참고문헌박영록편저‘의곡유문’,박영록·박우승 박사(한올고등학교 설립자)共著 ‘송월당삼대’,조선 왕조실록등.] 승정원일기의초책본의저자의곡공 박정현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원세계 의곡공박정현의묘,경기도고양시주교동제2묘역. 승정원일기-인조7년기사(1629)윤4월12일(정묘)박정현일기에서옮겼다는출처를밝히고있다. 선생의 생애 史草焚書의오명과박정현일기의태동 승정원일기의유실(流失)과소실(燒失) 승정원일기의 보물지정과 유네스코 등재를 기념하는 기념 비,충남예산군대술면농리. 일기청설치와공사문서의수집 승정원일기의개수(改修)와 脫草冊의 작성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