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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24년 7월 Column     명사 칼럼 작은 소리 큰 울림 범을 향한 행보를 시작했다. 김일성이 뒤따랐 다. 그는 1972년 12월 27일에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 을 채택하고 「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 으로 추대되었 다. 결국 7 · 4공동성명은 남과 북 모두에서 최 고 권력자의 권력과 지위를 격상시키는 개헌으 로 이어진 것이다. 이로써 7·4공동성명은 사실상 그 뜻을 잃었 다. 그것은 남과 북의 통일정책 수행에서도 드 러났다. 남(南)은 사실상 분단을 안정시켜 전 쟁을 막기 위해 분단의 현실을 제도화하는 방 향으로 나아갔다. 1973년 6월 23일에 박 대통 령이 발표한 「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특별 성명 」 이 바로 그 출발점이었다. 북(北)은 같은 날에 남(南)이 분단을 고정화시켜 ‘2개의 조선 을 조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비난하면 서 「 고려련방공화국 」 안을 제시했다. 이 안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金正日)을 김일성의 후 계자로 공인하고자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 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 고려민주련방공화국 」 안으로 바뀐다. 이후 북한은 남(南)에 대해 7·4공동성명의 정 신으로 돌아가라고 거듭 촉구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분단 현실을 타파하고 통일을 추구 하는 국가’로, 한국의 이미지를 ‘반(反)통일 세 력’으로 고착시키는 선전을 계속했으며, 한국 은 그 이미지를 깨트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 울였다. 특히 “우리는 결코 분단고정화 세력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확산시키려는 한국의 노력은 비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남(南)에서는 자신이 통일 을 지향하는 정치가임을 부각시키는 사례가 나 타났고, 그 대표적 사례가 김대중(金大中) 대통 령이었다. 김 대통령이 2000년 6월 13~15일에 평양을 방문하고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처음으 로 정상회담을 열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과 통일을 다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수 있 었던 것은 ‘통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굳히 려는 김 대통령 그리고 아버지 김일성의 ‘유훈’ 을 계승해 실현한다는 이미지를 굳히려는 김 위원장의 의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1972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김일성 북한 주석이  맞이하고 있다. 뒤의 인물은 김일성의 아우 김영주(나무위키 제공)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를 예방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 과 악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