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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8월31일 토요일 12 (제212호) 기획 임진왜란때성웅이순신장군은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하였다.이는뷺호남이없었으면이나라가 없었다.뷻라고호남민중들의나라사랑 을칭찬하신것이다.그리고호남의병장고경명장군과김천일장군이있었다면그이면에는회헌박희수선생이있 었음을우리는기억해야한다.고경명을 추대하여좌도대장으로삼고김천일을추대하여우도대장으로삼아진영을갖추었던일은호남의병사에길이남는 것으로,임진왜란에호남을지키기위한 선생의충정에서비롯된계책(計策)이라하겠다.그리고험난한바닷길을따라임금이있는행재소를오가며호남의 소식이선조임금에게전해지면서전황 (戰況)이소통되었다는점에서볼때대단히중요한계기가되어선조는매우기뻐하면서선생에게형조좌랑을제수 하기도했다.특히호남의병활동과왜적 의동태를면밀히분석하여의병을배치하고지원하였던것또한선생의놀라운지략에서나온것이니이순신장군 이약무호남시무국가를논하기전선생 은이미이런상황을짐작하고호남을지키기위한선견에놀라울뿐이다.본보에서는지난2021년12월호12면을통 해선생을소개한바있다.당시에는자료 가미흡하여임진왜란당시활동을조명하지못해이번호에서는임진왜란을통한선생의생애에대해소개해보고자 한다. 선생의 휘는 희수(希壽) 자(字)는 덕로(德老), 호 (號)는 회헌(悔軒)으로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충주 박씨는고려부정을지낸휘영을관조로하고있다.팔 세에이르러휘광리(光理)공은개성소윤을역임,사복 시정에 증직되었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 셋째 소 (蘇)는 선생의 고조부이다. 고려 말 조선 초 혼란한 시 기에중형진(참의공파조)과함께지금의대전으로내 려와은거하며경서(經書)를가까이했다.조선초진사 시에 오르고 감찰이 되어 경기지역 기근에 행대감찰 (行臺監察)로 파견되어 수령들의 배식 등을 면밀하게 감찰하여백성들에게골고루돌아가도록하였고,이어 좌랑, 의천·은산군사를 지내고, 손자 육봉공(휘 우)이 귀(貴)하게 됨으로서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이어 증손 사암(휘순)이영의정에오르니이조판서추증되었다. 증조부의 휘는 지흥(智興, 1411~1489)으로 호는 회암(懷庵)이다. 세종29년 정묘(丁卯, 1447)에 진사 시에 올라 성균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정치적인 혼란 속에 낙향하여현광주봉황산(鳳凰山)아래집을짓고순 수함을보전하며절의를지키며깨끗이살았다. 조부의 휘는 상(祥,1472∼1530),자는 창세(昌世) 이고,호는 눌재(訥齋)이다.기묘명현이다.연산군 2 년(1496) 23세의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정시문과을과에급제하였다.교서관정자(校書館正 字)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거쳤으며 자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으며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청백리 로 선록(選錄) 되었다. 시와 문학에 남다른 식견과 조회가 깊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諡號) 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김해도호부사(휘 민 제)이다.창녕성씨와의사이에둘째로1540년(중종3 5년)에태어난선생은숙부휘민중(敏中)공이후사 가없어선생으로하여금후사를잇도록하였다. 양부휘민중은일찍부터부친의가르침을받아학문 이 뛰어나고 18세 되던 기묘년(1519)에 사마시에 합격 하였다.글제주를겨루는데는서울의여러선비가그를 서진(西晉)의장원급제할것이라지목했다.평생저술 한것이병화(兵火)로소실되고다만무왕불포록(武王 不褒錄)과 이재론(夷齋論) 한편이 있어 동문선(東文 選)에들어있고또선집(選集)에부록으로되어있다.그 러나아쉽게도조졸하면서그꿈을펼치지못했다. 선생은1540년중종35년에전남광산군서창면사동 (寺洞, 현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마을에서 태어났 다.사동마을은증조부인찬성공(휘지흥)이대전회덕 에서 이주하여 큰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대대로 절 의를지키면서호남지역절의사상을대표하는마을이 라하겠다.이에선생은태어나면서부터선조들의절의 정신을본받고가학을충실히따르며성장했다.어려서 부터총명함이돋보여종숙부사암공(휘순,영의정)이 일찍이칭찬해자랑하여말하기를‘우리가문(家門)을 일으킬사람은틀림없이이아이다.’라고하였다. 점점성장하여회재박광옥선생(음성인)과제봉고경 명을따라수업하니기대가매우컸었다.1557년(丁丑,선 조10)에음직(蔭職)으로후릉(厚陵,조선2대정종과정 안왕후능)참봉에제수(除授)했는데나아가지않았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난 (亂)이있어왜군이파죽지세로몰려오자선조임금은 신의주로몽진(蒙塵)을떠나는등전국토가유린당하 는처지에몰렸다.이에선생은스승인회재박광옥과 함께 광주목사 정윤우(丁允祐)를 만나 ‘적병이 아직 재를 넘어 오지 못했으니 각 고을을 동원하여 요해지 (要害地)를 튼튼히 지키면 막을 수 있으니 적의 허술 한곳을틈타곧바로올라갑시다.’라고하자정목사는 즉시 화답하고 하고 완영(完營, 지금의 도청)으로 달 려가순찰사이광(李光)에게강력히주장했지만이광 은막연히응답이없어정목사는착잡한심정으로돌 아오게되었고,이때문에인심이울분에쌓여있었다. 한편 선생은 스승인 회재 박광옥,제봉 고경명,및 재종형 대수(大壽), 재종질 전 감찰(監察) 지효(之 孝)로 더불어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광주에 의청(義 廳)을 차리고 제봉 고경명을 추대하여 좌도대장(左 道大將)을 삼고, 회재 선생을 맹주(盟主)로 삼아 가 동(家 ) 60여 명과 양식 80섬을 내어 모집하는 한편으 로 싸움에 임하고 한편으로는 지키면서, 또 종매서 (從妹壻)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과 함께 한쪽 동 지 선비들을 일으켜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을 추대 하여 우도대장(右道大將)을 삼아 호서의장(湖西義 將)중봉 조헌으로 더불어 명성과 위세가 상호 어우 러지도록하여양호(兩湖)를막아낼계획을세웠다. 이광(李光)도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역시 군사 를내어충성을다하여공주(公州)까지가서는서울이 함락되었다는말을듣고곧명령을내려군사를해산시 켜 인심을 놀라게 하였다. 선생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곧바로 금강(錦江)으로 달려가 재종형 대수(大壽)로 더불어 본주(광주)신임목사 권율(權慄)을 따라 이광 에게 나아가 꾸짖어 말하기를 “종사(宗社, 종묘사직) 가 불타고 왕께서 파천(播遷)하셨는데 신자(臣子)된 자 마땅히 적과 싸우다 죽어야 하거늘 공의 군대 해산 은 무슨 저의인가?”하니 대수(大壽)가 칼을 어루만지 며눈을부릅뜨고그의머뭇거리는죄를다그치자이광 이부끄러워눈물을흘리면서말하기를“내가죽는것 은 두렵지 않은데 박모 형제가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 때군사동원이급하게되어 이광도어쩔수 없이방어 사 곽영(郭嶸)으로 더불어 사만(四萬)군사를 거느리 고 직산(稷山)까지 갔다가 적이 용인(龍仁)을 위협하 자이광이곽영으로하여금먼저공격토록했으니권율 장군이중위(中衛)가되어곽영의군에속해있고대수 (大壽)가 권율의 참모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권율이 굳게 말려 말하기를 「적이 이미 험한 곳을 확보하여 창졸이 치기 어려우니 조강(祖江)을 건너 가서 임진(臨陣)을 막는 것만 못하겠다.」하였으나 이광은듣지않고선봉(先鋒)백광언(白光彦)과 조 방 이지시(助防 李之詩)를 몰아세워 가볍게 접전했 다가 모도 패하여 죽고 군사들이 지례 달아나 무너 지자이광은먼저도망쳐버리고말았다. 권율이 드디어 본주(本州, 광주)로 돌아와 재거(再 擧)를 도모했으나 이광이 파진(罷陣)한 뒤로 민심이 느슨해져서호응하지않았다.선생이회재선생과의논 하여 고을 안 자제(子弟)500여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 에격문(檄文)을띄워정예병수천을얻어권율에게배 속시켜 이치전투에서 크게 적을 파(破)하여 도망하는 적을막아주니호남(湖南)이점차편안하게되었다. 이치전투에 대해 ‘국조보감,은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있어인용해본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君)을 출동시켜 이치(梨 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 사를거느리고편비(偏裨부장(副將)위대기(魏大奇)븡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낭떠러지를타고기어오르자황진이나무를의지 하여총탄을막으며 활을쏘았는데쏘는대로맞지않 는것이없었다.종일토록교전하여적병을대파하였는 데,시체가쌓이고피가흘러초목(草木)까지피비린내 가났다.이날황진이탄환에맞아조금사기가저하되 자권율이장사들을독려하여계속하게하였기때문에 이길수있었다.왜적들이조선의3대전투를일컬을때 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븡황진은 이전투로이름이드러났다.왜적이웅치(熊峙)의전진 (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 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고서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위로한 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썼다.」이같은기록은‘난 중잡록’,조선왕조실록에도상세하게소개하고있다. 7월에는 행조로부터 선생에게 한성부참군(漢城 府參軍), 군기시주부(軍器寺 主簿)를 연달아 제수 (除授)하여 은명(恩命)이 겹쳐 이르자 선생이 더욱 감격하여 동맹(同盟)에게 두루 일깨워 죽을 힘으로 충성을다하였다. 【선조 25년 임진(1592)7월 19일(병자),고경명븡김천 일븡박광옥븡이호민븡정운룡븡박희수등에게관직을제수 하다.고경명을통정대부공조참의지제교(知製敎)에, 김천일을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박광옥을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이호민(李好 閔)을홍문관응교에,정운룡을장원서장원(掌苑署掌 苑)에, 박희수를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문신기 (文愼幾)를사섬시참봉(司贍寺參奉)에제수하였다.】 그러나적세(賊勢)가창궐하여도로가막히고끊겼는 데회재선생이군무(軍務)를조목별로아뢰게되었다. 9월에는 호남거병과 이광의 무능함을 지적한 글 을 품고 지름길로 바로 임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탑전(榻前)에 나아가 뵈니 왕께서 물으시되 「네 누 구관대 위험을 무릎 쓰고 나를 보러 왔는고?」 하시 니 백사 이항복이 대잡해 아뢰기를 「선정 신(先正 臣) 박상(朴祥)의 손자이옵니다.」하니 왕께서 말씀 하시기를 「네할애비의손자가 아니면 어떻게이와 같이할수있으리요.」하셨다. 상소의내용을보면스승회재선생과함께민심이 반의원인을전라도관찰사이광(李洸)에게서찾았다. 이광은오랫동안병권(兵權)을잡고한번도접전 (接戰)하지 않았으며 의사(義士)를 시기하여 움직 이면문득막아흩어버리고또금산(錦山)싸움에서 기꺼이 군사를 내지 않아 후원(後援)이 없으므로 하 여고경명부자가진(陣)이무너져순절(殉節)했으니 이광의 죄는 참수(斬首)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광 을처벌해야민심이돌아올것이라판단했던것같다. 임진왜란때선조가의주(義州)로파천하였을때윤 두수와윤근수가수행하면서겪은일을기록한용사호 종록(龍蛇扈從錄)에이를뒷받침하는기록이있다. 『장성(長城)에 사는 왕자사부(王子師傅)정운룡(鄭 雲龍),광주(光州)에 사는 진사(進士)박종정(朴宗挺), 생원(生員)유사경(柳思敬)등이항소(抗疏)를올려이 광이머뭇거리면서진격을하지않은상황을진술하고 는,무인(武人)박희수(朴希壽)를보내어행조(行朝)에 진달하게하였다.당시에정승으로있던해원군윤두수 는 바로 박종정의 처종형(妻從兄)이었다.박종정이 해 원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본도의 감사를 만 약행조에서제수해보낸다면,한달안으로는이곳까지 오기가쉽지않을것입니다.도내의수령가운데에서는 오직권율만이담략과기략이있습니다.이사람보다더 적임자는없습니다.”하였다.우산기사(牛山記事)』 이광의죄상은첫째,7~8만의관군을이끌고공주(公 州)까지올라갔지만일본군을막고나아가서울을지켜 내지못한점이다.이광의관군이만약서울을지켰다면 이후경기를보전하고영남을회복할수있었을것인데 그러지못했다고아쉬움을토로하고있다.둘째,이광은 선조(宣祖)가한성을떠나파천했다는소식을듣자파 진(罷陣)해버리고맨먼저전주까지내려와버렸다는 점을들었다.셋째,이광의용인(龍仁)전투패배에대한 것이다.적병이수백명에불과했지만,겁을먹고후퇴를 하면서삼도(충남,호남,경남)의관군이흩어져버렸다 는것이다.이로인해호서(湖西)와기내(畿內)를비롯 한지역의민심의이반도격화되었다고이해했다. 호남절의록에는 박종정(朴宗挺, 함양인) 정운룡 (鄭雲龍)유사경등이함께이광의불충한죄상들을 조목조목 짚은 소(疏)를 만들어 박희수(朴希壽)로 하여금 용만(龍彎) 즉, 선조가 있는 행재소에 올렸 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선생이 전했던 이 상소는적지않은의미를지닌다.즉,“박희수는험난 한바닷길을따라전하께서피난하신행재소에도착 했으니 이날부터 호남지방과 함경북도의 소식이 비 로소 통하게”되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당시 조정에서는호남지방의정보가전해지지않아,근왕 병에 대한 소식을 몹시도 고대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러한때에박광옥이박희수를보내호남의소식이 선조에게 전해졌는데, 전황(戰況)이 소통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선조는매우기뻐하면서박희수에게형조좌랑(刑曹 佐)을제수하고또권무과제록원종훈(權武科第錄 原從勳)을하사하였다. 난(亂)이차츰진정되자함열현감(咸悅縣監)이되었 다.그리고1599년10월26일에하세하니향년59세이다. 선조25년(1592) 4월 13일 오후에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일본침략군은14일에는부산을함락하고다 음날에는 동래성을 함락한 후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충주를 거쳐 20일 만에 서울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 로부터40일만에평양을점령했으며평안도와함경 도를 휩쓸어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일본 침략 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동안 사회와 당쟁을 벌 이고 있던 조선왕조는 일본을 통합한 풍신수길(豊 臣秀吉)이 침략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그 준비를 서 두르고있는가운데서도동인,서인하면서싸우느라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다. 왕과 조정은 서울 을빼앗기고평양으로도망쳤다가다시의주까지도 망쳐압록강을건너려는생각까지하고있었다. 전국토는왜놈의발에짓밟히고국민들은살육과 기아에떨었으며전답은폐허가되었고여자들은왜 놈에게 강간당하거나 절개를 지키느라 자결하는 처 절한 상황이 되었다.그야말로아비규환의아수라장 이 되었고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위 기에처해졌다.이때나라와민족을위해용감하게싸 우다 순국한 사람들, 관군이나 관군을 도와 공을 세 운 이치전투와 행주산성 전투, 이순신장군의 해전, 그리고의병을일으켜향토를방어하거나충청도,함 경도,경상도에서분전하여나라와민족을구출한사 람들은모두호남인들이었다.또한일본침략의예봉 을면한호남지방은부지런히농사를지어조정의관 료들이나 관군 그리고 의병들의식량을공급했으며, 우리를도운명나라군사의군량을보급했다.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확약한 사람은 나주출신의 김천일인데 그는 대대로 창평에서 살다 가어머니의고향인나주에서출생해일찍부모를여 의고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 자고경명,박광옥,박희수,정심,최경회,등과의병봉 기를의논하고솔선해서송제민,양산숙,임환등과의 병을일으켰다. 조선왕조 실록 ‘선조 25년 임진(1592) 7월 19일(병 자)’기사에 「이조가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모은 유사 경등의논상을아뢰다」이비(吏批)가아뢰기를,“김천 일(金千鎰)븡고경명(高敬命)븡정운룡(鄭雲龍)븡박희수 (朴希壽)븡곽현(郭賢)븡양산숙(粱山璹)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는데대해서는하교(下敎)를받았고이미승전 (承傳)을 받들었습니다. 즉시 정원룡(鄭元龍)의 상소 를 상고하니, 생원(生員) 유사경(柳思敬)과 진사(進 士)박종정(朴宗挺)은정운룡과 연명(連名)이되었습 니다. 그리고 급제(及第) 박광옥(朴光玉)은 고경명과 함께의병을초모(招募)하여그대로본도에머물고있 으며, 또 앞으로 향병(鄕兵)을 규합하려 한다 합니다. 이 세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하니,세 사람은 다른예에따라관직을제수하라고답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20일(정축)의 기록에는 ‘이유 징븡심우승븡박동량븡이광정븡양산숙븡박희수 등에게 관 직을 제수하다’ 이유징(李幼澄)을 사간원 사간에, 심 우승(沈友勝)을 사간원 헌납에,박동량(朴東亮)을이 조 좌랑에, 이광정(李光庭)을 사간원 정언에, 양산숙 (梁山璹)을공조좌랑에,박희수(朴希壽)를사포서사 포(司圃署司圃)에,곽현(郭賢)을사축서사축(司畜署 司畜)에제수하였다.이는선생이의병을모은사실이 사기(史記)에전해지는대목이다. 고경명은박광옥,박희수 선생이 주도하여모았던 6천 여 명의 호남의병을 거느리고 북상을 서둘러 여 산을거쳐은진에도착했는데왜군이금산을넘어전 주를위협하려한다는급보를받고금산으로진군하 여 관군과 합세하여 성을 지키기로 했다. 그는 충청 의의병장조헌과합세하기로했는데관군이무너지 자 함께 패하여 자신은 물론 선봉장 유팽로,후군장 안영과 아들 고인후가 모두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 때군량을조당하고의병을모아고경명의의병활동 을지원한사람이인근에거주하여자주구국의방향 을 논의 하는 등 선생은 주로 후방에서 의병을 모집 하고 군량을 모아 지원을 아끼지 않은 백의의 장군 이었다. 또한 보성출신인 임계영은 문과에 급제하여 수령 을 지내고 고향에 은거하던 중 왜란을 당해 왕자사 부인 죽전 박광전(진원인), 능성현령 김익복 등과 같이 보성관문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을 사수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처럼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 키고 또 이에 동조한 수만의 의병들의 활약으로 도 탄에빠진나라를구하게된것이다.조정에서는당쟁 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소회시키고 위험시 했던 호남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구출하는데 앞장서자 놀 라움과반성의빛도보였다.그러한 상황에서도 생명 을바쳐구국의전선에나설수있었던것은이고장에 충만한충절과의리정신이있었기때문이었다. 선생은일찍이가정교훈을받고겸하여스승과벗 의 도움을 얻어 뛰어나고 타고난 기질로 곧고 겸손 한 지조가 있어 벼슬이 내려도 나가지 않고 어지러 운 세상을 만나 백의(白衣)로써 의병을 규합(糾合) 하여 호남을 방어하고 마침내 또 위험을 무릎 쓰고 왕에게적정(賊情)을갖춰보고드리고흩어진군사 규율을 잘 바로잡고 권율을 천거하는 등 쓸 만한 인 재를발탁하여정당한논의(論議)를다하여크게구 제함이많았으니어찌꼭칼을꺾고진(陣)을함락시 켜서만비로소공업(功業)을논할것인가! 예나지금이나전쟁에서정보만큼중요한것은없 다. 험난한 바닷길을 따라 전하께서 피난하신 행재 소에전황을상세히알리니이날부터호남지방과함 경북도의 소식이 비로소 통하게 하였다는 것은 또 다른평가이기도하다. 특히 이치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할 수있도록든든한후방지원은선생의또다른업적이 다.이렇듯선생은백의(白衣)로서거의하고이를뒷 받침 하였으니,이에 선생을 백의 장군(白衣將軍)이 라불러야할것이라고조심스럽게주장하고싶다. 공명을 멀리하고 오직 충과 절의를 숭상해 온 선 생의 삶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에 존경해마지않는다. 참고문헌 : 후광세첩(厚光世牒), 은봉전서(隱峯全 書,안방준),건재김천일전집,이재유고(頤齋遺 藁,황윤석),호남절의록,국조보감,충주박씨세보등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임진왜란백의장군회헌박희수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家系) 회헌공박희수선생묘소,광주광역시서구용두동. ‘호남창의록’의박희수선생에관한기록,호남거병과이광의무능함을지적한글을품고행재소에가상소문을전달한기록이다. 차정첩, 만력 20년(1592년) 7월 20일계공랑 참봉 박희수를 계공랑 한성부 참군(정7품)에임명하였다.(7품이하의관원또는官府 의장이속관(屬官)에게내리는임명장으로차첩이라고도한다.) 만력20년(1592)9월16일군기시주부박희수를선무랑형조 좌랑(정6품)에임명한교첩(5품이하관리에대해이조와병 조에서왕명을받들어발급하는문서) 선생의생애 임진왜란과호남의병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