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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6월30일 일요일 12 (제210호) 기획 박성원선생의자는사수(士洙)호는겸재(謙齋).시호는문헌(文獻)이다.이재(1680-1746)의제자로서많은저서와업 적을남긴학자이자문신이다.정조의스 승으로영조는정조의학문에는‘박성원의힘’이라는칭찬을듣기도하였다.그러나강직한성품으로직언을서슴지 않아남해에유배되어위리안치되면서 도그의높은창작은지금도많은사람에게전해진다. 예학을중시하여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책자를만들어후 학의예서연구에많은도움주었다. 이 조판서에추증되고,저서로는예의유집.돈효록.광암집.강목활요.강원목록.보민격선.오복명의.심근강설등이있는 데유품(세손사필世孫賜筆)과 함께 국 사편찬위원회에기증되었다.지난5월18일밀성(밀양)박씨전국청년회에서는선생의흔적을더듬기위해남해를찾 아‘남해유배문학관’에선생이남긴시 (詩)를보았다.이에이번호에서는선생의생애와활동저서예의유집등을함께소개해본다.본원고는김윤정선생의 ‘겸재박성원의예학과예의유집의성 격’에서많은부분옮겼음을밝혀둔다. 박성원 선생의 본관은 밀양박씨로 字는 사수(士 洙)이고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의 아들 사형제 중 넷째인 화록공(휘 호원)의 5대손이고, 증조는 박 승임,조부는 박현주(朴玄胄)아버지는 학생 박진석 (朴震錫)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연일정씨이다.아 버지는 초야에서 경서로 소일거리 삼았으니 별다른 관직을역임하지못했다.그런만큼박성원은어디서 왔는지도모르는박성원이라든가“세력이없는인물 (無勢之人)”으로 평가받았다.박성원은 1767년 자신 의6대조인박충원의시장(諡狀)을지어선조의업적 을 선양하고 하였는데 ‘무세지인’인 박성원과 그의 가문에는매우필요한작업이었을것이다. 박성원은 1726년경부터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서수학하면서서인-노론의중심인물로성장 하였는데그는스승인이재와마찬가지로과거에합 격하여관직에진출하였다. 1721년(경종1) 생원시에 합격했고, 1728년(영조 4)별시문과의을과에급제한후언관으로서사간원 과사헌부의별을역임하였다. 또한 서인-노론의 입장에서 영조의 탕평론(蕩平 論)에매우비판적이었다.1744년(영조20)사헌부지 평으로서 11조목의 계사(啓辭)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계사의 주요 내용은 첫째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에들어가는것을반대하고,둘째사관(史官)의임명 이 대신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를 지적하고, 셋째 임 석헌,조명염등관리들의잘못을비판한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고, 박성원을 불 러들여일일이꾸짖었다.박성원이기로소에들어가 는것을반대하는것을반박한것은임금을모욕하는 것으로 여겼고, 여러 관리들을 비판한 것은 “반드시 진신(搢紳)들을 모두 쫓아내려는 계책이다”라고 강 하게 비난하였다.또한 사관제도의경우영조가탕평 의일환으로사관(史官)과삼사(三司)의임명방식을 천거(薦擧)가아닌권점(圈點,관원을임명할때후보 자의 이름 밑에 찍는 둥근 점을 이르던 말.)으로 바꾸 었던만큼,이에대한바판은탕평책에대한비판으로 받아들어졌다. 영조는 “헌신(憲臣)의 가슴속에 가득 찬당심(黨心)”을지적하였다.이후영조는박성원을 지지하는 정언유,박치강 등을 “당파의 습성”으로 비 난하면서귀양보내는등엄하게대처하였다.“사람이 벌벌떨”고있다는표현이나올정도로상황은급박하 였다.영조는붕당에관련된 언행을 매우 미워하면서 탕평의의지를강하게피력하고있었다. 이때의선생이올린11조목을두고군신들의반응 이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하게 전해져 일부만 인용해본다. 『[영조 20년 8월 29일 계유 3번째 기사]지평 박성원 (朴聖源)을 남해현(南海縣)에 귀양보냈다. 박성원이 대간에나아가서11조목을아뢰었는데,그첫째에이르 기를,뷺성상께서기사(耆社)에들어가시는거조는태조 조(太祖朝)때에실지로시작되었고우리숙종[肅考]께 서 이를 계승하였으니, 금일에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은 태조와숙종께서이미시행하였던규범에있지않겠습 니까? 그..... 중략.....계본(啓本)이 들어가자,임금이 말하 기를,"이것이반드시진신(搢紳)들을모두쫓아내려고 하는계책이다.뷻하고,이어서박성원을불러들였다.임 금이매우노하여자세하게하교하기를,뷺전국시대(戰 國時代)의 사람들은 초(楚)나라가 아니면 조(趙)나라 로갔었는데,한쪽구석에있는조선은남만(南蠻)과북 적(北狄)이외에는갈만한데가없다.이것이무슨심보 인가?내가기미(機微)를알아차리고서일찍이물러났 던들,어찌너에게이처럼곤욕을당하겠는가?조신(朝 臣)이혹시비슷하지도않는데기사(耆社)에들어가는 자가있다면이것을반박하더라도좋겠지만,네가감히 인군(人君)이기사에들어가는것을반박하는가?존호 (尊號)의여덟글자를어찌하여반박해서바로잡지아 니하고곧이처럼계달(啓達)하는가?뷻하고,그계본을 일일이들추어서몹시꾸짖었다.박성원이마음속에품 은생각을진달하고자청하였으나,임금이그의관직을 체차하라고 명하고,드디어 대소 공사(大小公事)를 승 정원에 머물러 두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승지 남태량 (南泰良)이말하기를,뷺신의팔뚝이끊어지더라도이와 같은하교를신은감히쓸수가없습니다.뷻하니,임금이 또남태량의관직을체차하고바로승정원에비망기(備 忘記)를 내렸으나, 승지 정필녕(鄭必寧)과 이창의(李 昌誼)가이를반포하지아니하고서인하여청대(請對) 하자,임금이허락하지아니하고여러승지들을모두체 차하였다.남소위장(南所衛將)송징태(宋徵泰)를임시 로 임명하여 승지로 삼고, 또 서명구(徐命九)·조명리 (趙明履)·조상명(趙尙命)·조재호(趙載浩)와 응교 윤 광의(尹光毅)·필선 박필재(朴弼載)를 특별히 제수하 여승지로삼았다.--생략-- 사신은 말한다. 뷺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말하기를꺼리지아니하였으니,비록그마음이과 연공의(公議)에서나온것인지는알지못하겠으나그 기백은숭상할만하고,그말도또한취할만한것이많 았는데,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 에 그 몸은 귀양가고 그 말은 쓰여지지 못하였으니,애 석한마음을이길수가없다.아!이세상을돌아보건대, 당파가없는사람을어찌얻을수가있겠는가?다만그 말의 시비(是非)를 보아서 취사(取捨)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어찌당인(黨人)이라고지목하여그말을다버 릴수가있겠는가?조명겸의무리는하나같이의금부에 나아갔으나,곧 모두 죄가 없다고 밝혀졌다.그러나 박 성원이논한바가또한어찌다허망한말이겠는가?뷻』 박성원은2년동안남해에머물면서400여수에이 르는 시문을 남겨 븮남천록(南遷錄)븯이라는 제목의 유배한시가남해군을통해세상에공개되었다. 선생은 스승인 이재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했 다.이재는유배지에서박성원의의식(衣食)을걱정하 면서도독서에힘쓸것을권했다.박성원은1746년1월 위리안치에서풀려났고,그해10월이재의사망이후 에는천문(泉門,이재는寒泉精舍에서강학에힘써제 자들은스스로泉門을의식)을이끄는역할을담당했 다.그는노론의리에철저하여1748년당심(黨心)으로 지목된지평이기경을지지하다가대간으로천거되는 대통(臺通)에서 제외되기도 하였다. 1749년 검의(檢 擬)를허락하는명령이내려와관직에추천되었으나1 750년어머니와형,형수가연이어사망하면서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상(喪)을 마친 후 1754년에 사헌부 장령으로발탁되었고,1759년에는사헌부집의가되어 영조에게언로(言路)를열것을간쟁하였다. 1759년 8월 박성원은 강서원(講書院)의 좌익선(左翼 善)으로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가르쳤고,1761년에 는정3품유선(諭善)으로임명되었다.그는어린정조에 게소학(小學)을가르치면서‘소학’을읽는것은몸소실 천하기위한것임을강조하였고,몸을주재하는심(心)과 그심을주자하는경(敬)을중시하였다.영조로부터세손 의학문은박성원의힘이라는칭찬을듣기도하였다. 이사실을왕조실록을통해본다.『영조실록99권, 영조 38년 4월 25일 무자 1번째기사[왕세손의 회강 을거행하게하다] 임금이경현당에나아가왕세손의회강(會講)을하게 하였다.임금이말하기를,뷺69세에이처럼3백년후에븮처 음븯이런일을보게되니,참으로뜻밖이다.이번의연교(筵 敎)는한림(翰林)과주서(注書)역시강관(講官)과함께상 확(商確)하여1통을만들어1건(件)은대내(大內)에들이고 1건은강서원에걸어두어야한다.뷻하였다. 임금이세손에게말하기를,뷺태왕(太王)이거빈한것 이우리시조(始祖)의일과서로부합되어,기산(岐山)에 서 봉황(鳳凰)이 운 것과 〈태조(太祖)의 꿈에〉 신인(神人) 이 금척(金尺)을 준 것은 모두 저절로 상서(祥瑞)가 이르 렀으니,하늘에순종하는임금은바로이런상서가있게 된다.대저나라를세우기어려움은하늘을오르는것과 같고,망하기쉬움은털을태우는것과같다.시험삼아3 백년의종사(宗社)를생각건대,네가만약부지런히힘 쓰기를그만두지않는다면어찌다만4백년뿐이겠는 가?주(周)나라8백년의복조(福祚)에거의가깝게될것 이다.맹자(孟子)의 ‘인욕(人慾)을 막아야 한다.’는 말과 예기(禮記)의‘공경하지않음이없어야한다.[無不敬]’는 말은그근본이모두‘인의(仁義)’두글자에있는것이다. 조선(祖先)의마음은자손이현명하기를바라기때문에 너에게바라는것이깊다.조선(朝鮮)은제(齊)·초(楚)와 달라서 삼한(三韓)을 통합하여하나가되어혹시라도 강역(疆域)에일이있게되면본토(本土)를지키는이외 에는다른방도가없다.내가반드시수성(守城)하고자 한 것은 우리 적자(赤子)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겠는 가? 일찍이 남한일기(南漢日記)를 보건대 성(城)에서 항복할때백성들이울부짖으며말하기를,‘우리임금 이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는가?’라고 하였는데, 내가 매양이구절을읽고는나도모르는사이에눈물을흘 렸다.지금비록금성탕지(金城湯池)가있다하더라도 가서는안되는데,만약뜻밖의일이있으면지켜야하 겠는가?그렇지않아야하겠는가?뷻하니,세손이말하 기를,뷺나라를지켜야합니다.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뷺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무슨뜻이있는가?뷻하니,답하기를,뷺버려서는안되 기때문에그렇습니다.뷻하였다. 임금이말하기를,뷺나라를세운것은임금을위해서 인가,백성을위해서인가?뷻하니,세손이말하기를,뷺임 금도위하고또조선(朝鮮)을위해서입니다.뷻하매,임금 이말하기를,뷺그대답이좋으나오히려통창(通暢)하지 못함이있다.그본뜻은백성을위해서세운것이다.뷻하 였다.임금이말하기를,뷺너의학문은바로박성원(朴聖 源)의힘이다.스승을존경하고벗과친하는것은소학 (小學)의도리이며,‘어진이를어질게여기되색(色)을좋 아하는마음과바꾸어하라.[賢賢易色]’는것은공문(孔 門)의 가르침이다. 네가 후일 박성원을 경애(敬愛)하겠 는가?뷻하고,또하교하기를,뷺하늘이임금을세우는것 은 자봉(自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민(養民)하기 위 해서이다.민심을한번잃으면비록임금이되고자하더 라도되지 못하니,너는백성 두려워하기를사부(師傅) 보다더해야한다.뷻하였다. 세손이 안으로 돌아가니,박성원이 말하기를,뷺신 은세손이점차성취됨을알고있으나언제나사람의 마음은칭찬하는말을들으면자만심(自滿心)이생기 기가쉽고,자만하게되면게을러지니그것이매우두 렵습니다.신의생각에는좋은점은반드시지나치게 추장(推奬)할 필요가 없고 부족한 점만 매양 계칙(戒 飭)을가해야하니,이것이성취하는방도입니다.뷻하 니,임금이찬(饌)을들라고명하였다.』 이후 박성원은 참판을 마지막으로 1767년 봉조하 (奉朝賀,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이품의 관원이 퇴 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 종신토록 신분에 맞는 녹봉(祿俸)을 받으나 실무는 보지 않고 의식에만 참 여한다.)가 되었는데 이때 영조에게 수서(手書) 어 제사전(御製謝箋)을하사받았다.그리고그해1월1 5일71세의일기로고종명(考終命)하니이조판서홍 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겸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의금부부사의증직을내렸다. 정조는어린시절자신에게학문을가르쳤고아버 지사도세자의죽음으로인한위태로운시기를함께 했던박성원에게돈독한감정을가지고있었다. 박성원 사후 시호를 문헌(文獻)이라 내렸을 뿐 아 니라 자손들을 음직(蔭職)으로 등용하도록 하였다. 정조는박성원을‘한시대의인물중에서엄선한사람’ 으로 평가 하였고, 그의 저작인 븮돈효록(敦孝錄)븯과 븮禮疑類輯)븯등을왕명으로간행토록하였다. 박성원은당시이재의문하에서가장뛰어난인물 로인식되었고,이재사후 ‘천문’을 주도적으로 이끌 었다. 먼저 박성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한원진의‘한천시(寒泉詩)’비판에대응하는것이었 다.1746년이재는제자인최우(崔祐)가한원진을찾 아간사건을계기로한원진학설의오류를지적하는 ‘한천시’를 지었다.이듬해인 1747년 한원진은 ‘제한 천시후(題寒泉詩後)’를 지어 이재의 논리가 인수 (人獸),유석(儒釋),화이(華夷)의분별을흐리게한 다면서노골적으로비판하였다.이재는이미사망한 후였으므로 제자들이 이 논쟁에 참여하였는데 박성 원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최석이 한원 진을 찾아가 논쟁을 거론한 것이 스승에게 해를 끼 친것으로평하였고,한남당시발변설(韓南塘詩跋辨 說)을지어한원진이이재의‘한천시’를비판한것을 재비판하였다. 또한 ‘심성설12조(心性設十二條)’를 통해 호론의 심성론을 꼼꼼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심성설12조’를 통해 호론의 심성론을 꼼꼼하게 비 판하였다.그는스승의심성론을계승하면서낙론의 정통성을확인하는일에전력을다하였다. 또한스승이재의문집편찬을주도하였다.백수양응 수(1700~1765)는 박성원에게 편지를 보내어 “형이 이미 죽음을 기다리는 중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 해내지 못 한다면 형이 사망한 후에는 누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라고하면서빨리문집을편찬하도록독려하였다.박성 원은1763년에이재의연보(年譜)를초(草)하고가장(家 狀)을지었는데가장에서곧문집몇권이간행될것이라 고한만큼문집간행은상당히진척되어있었다.그런데 담와홍계희(1703~1771)가이재의문집에서자신을죄주 었던 서판(書板)을 빼려고 초고를 가져가 버림으로써 박성원과갈등을빚었다.이렇게문집편찬이지연되는 가운데 영조 말 박성원이 사망으로써 그가 주도하던 문 집의간행은중단되었다.이후이재의학통이김원행으 로연결되면서박성원은낙론학통에서배제되었다. 예의유집은 잠계 이유철 (1663-1740)의 ‘사례집설(四 禮集說)’을 기초로 스승 이 재의 조언을 구해 편찬하게 되었다.이유철은예학에 전 념하여 고례(古禮)를 정리 하한‘사례집설’과김장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 송시 열의 ‘결례의의(經禮義疑)’, 박세채의 ‘남계예설(南溪禮 說)’을합록(合錄)한예서를 저술하였는데 두 책을 모두 완성하지못하고사망,이에 그의 아들인 이희정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박성원 에게이를마무리하여줄것을부탁하였다. 박성원 선생은 이 문제에 대해 스승 이재에게 자 문을 구했다. 이재는 “‘사례집설’은 주자의 ‘가례’에 우익(羽翼)되나 우리나라 학자의 예론이 웅변에 가 장잘맞고또쉽게해석됨만못하다”고평하였다.이 에 스승의 견해를 받아들여 조선 학자들의 예설을 중 심으로 ‘예의유집’을 편찬하였고, 이는 이유철의 책 에서번잡한내용은삭제하고다시여러문집에서예 을발췌하여보충하였다.10년에넘는시간과노력을 쏟아항목을나누고제목을정하는작업을진행하였 다.그결과로원서24편부록2편,총26권15책에달하 는거질의‘예의유집’을편찬되었던것이다. 이에대해선생은다음과같이밝히고있다. 『집안의 일용(日用)의 예(禮)는 관혼상제(冠婚喪 祭)가가장중요하다.상변(喪變)이한결같지않은것 은 ‘증자문(曾子問)’에 고금을 참작하였던 것에서 남 김없이다루어졌다.그러나찬하의사변(事變)은더욱 끝이없어옛사람의의논이혹미치지못한바는또한 후세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조선에서 현유(賢 儒)가 계속 나와 예학이 크게 밝아졌으니 의심나면 질 의해두었고,질의가있으면반석해놓았으며,또한더 러는스스로설을지어밝히기기도하였다. 비록 그 상략동이(詳略同異)는 같지 않지만 요컨대 모두 서로 참고하고 근거할 자산이 되니 대개 증자가 묻지않은바에‘가례(家禮)’에싣지않은바가또한많 이밝혀져예경(禮經)에보충됨이크다.다만그설이각 한책을이루거나혹은제가문집중에산출되니궁향 (窮鄕)의선비는이미다모으지못하고,급한때에는또 두루 살펴보기 어렵다.이로써 사람들이 고례에 없는 변례(變禮)를만나면비록선배가이미논한바가있어 도늘스스로어둡고혹한책에서그설을얻어도여러 책에또다른설이있음을알지못하여끝내참증하여 절충함이없었다.책은비록많아도사용할때빠뜨리 는까닭이니학자가항상병으로여겼다.』 예의유집은조선의축적된예설들을항목별로분류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던 만큼 구성의 치밀함과 방대 함이가장돋보이는예서라할수있다.구성상의특징 을보면 많은항목들을‘대목(大目)-소목(小目)-차소 목(次小目)으로배열하여체계적으로구성하였다.관 례,혼례,상례,제례등을대목(大目),상례에해당하는 초종,오복등을소목(小目),오복의본종복,부재위모 등의내용을차소목(次小目)으로지정하였다 정조임금은의례(疑禮)의고증에도움이 됨을아름 답게 여겨,친히 서문(序文)을 지어 간행하여 널리 보 급하도록하였는데이책은본집24권,목록2권,부록2 권, 합 28권 15책. 활자본으로 권1은 관례와 삼가관례 (三加冠禮)에 대한 문답, 권2는 혼례, 권3은 상례(喪 禮),권4도상례(목욕에서혼백까지),권5·6은오복,권7 은조석곡(朝夕哭),권8은장기(葬期)에서성분(成墳) 까지, 권9는 폄(하관)에서 여묘(廬墓)까지, 권10은 우 제(虞祭)·소상(小祥),권11은대상(大祥),권12는거상 잡의(居喪雜儀), 권13은 상중행례(喪中行禮), 권14는 부재모상(父在母喪),권15는국휼,권16은상변례(喪變 禮), 권17은 계유변빈, 권18은 도유상(途有喪), 권19는 초빈(草殯)과권장(權葬),권20-24는 제례,부록2권은 종법(宗法)·거가잡의(居家雜儀),그밖에목록이있다. 정조는 어제서문에서 “본조의 열성(列聖)이 유교 를 진작한 뒤 300년 동안 예에 밝은 사람이 40∼50가에 이르니 예에 대한 고훈과 학설이 각처에 산재해 한 데 모으기가 어려웠는데, 박성원이 이를 극복하고 종법 과잡례를총망라해책을만든것이가상해교서관에 명해간행하도록한다.”고그간행경위를밝혔다. 정조실록 16권,정조 7년 12월 24일 신사 2번째 기사 [교서관에서인출한예의유집을올리다]를보면이를 뒷받침한다.「교서관(校書館)에서인출(印出)한예의유 집(禮疑類輯)을올리었다.이에앞서임금이고(故)유선 (諭善)박성원(朴聖源)이찬술(撰述)한예의유집을가져 다가보고서의례(疑禮)의고증에도움이됨을아름답게 여겨,친히서문(序文)을지어교서관에서활자(活字)로 인출하여 널리 반포(頒布)하도록 명했었는데, 이에 이 르러인출하여올린것이다.」 박성원선생은이재의제자로서많은저술과업적을 남긴학자이자문신이다.남해에유배를와서가장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분량으로 본다면 두 편 의소설븮구운몽븯과븮사씨남정기븯,문학평론집븮서포만필븯 등을남긴서포김만중이겠지만,숫자로본다면단연겸 재(謙齋)박성원(朴聖源1697-1767)선생일것이다. 븮남천록(南遷錄)븯이라는제목의유배 한시가 남해군 을통해세상에공개되었고,편수로만4백여수에이르 는유배한시가실려있다.1년5개월정도남해에서유 배했으니,거의 날마다 시를 썼다고 해도 무방하다.남 천록에는단순히유배를온사람의고적한삶과남해지 식인들과교유한정황들만담겨있지않다.그는남해의 풍속이나명승지,문화유적등을찾아다니면서그때의 정취와감회를시에녹여놓았다.18세기중반남해의모 습을이해하는데이만큼소중한자료는없을것이다. 또하나의저서‘예의유집’18세기중반까지의조선의 예설을집대성한예서로서조선의지식이고증의중심 이 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의 유집’이 18세기 조선에서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은 체계 화가필요한만큼양적·질적발전을이룬조선의예학 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적인 것을 그대로 인정 하고실천하려고했던조선후기의문화적배경을보여 주는것이라고할수있다.또한예의실천에서문제되 는 변례를 해결하기 위한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졌고, 유서의형식에따라찾아보기편하게항목을분류하는 체제적인구성이갖추어졌다.유서의성격을갖는예서 의편찬은18세기조선사상계의흐름과일치하는것으 로예담론의확대에중요한역할을하였다.이러한예 서의등은더 많은사람이쉽게예설에접근하고그만 큼담론이더욱확대되는계기가되었을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업적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한방의서에 ‘동의보감’이 있다면 조선의 예서에선생이지은‘예의유집’이있다고할것이다. /자료제공화록공파종친회박수옥회장. /글정리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생애와활동 지난달18일남해유배문학관을찾은밀성(밀양)박씨전국청년회회원들이문학관마당에있는시비를담고있다. 박성원선생묘소,경기도양주시화도읍차산리산51번지. 박 성원은 효가 만선(萬善)의 근원이고 지덕(至德)인 동시에 지도(至道)임을 절실히 느끼고, 『효경』이 이러한 도덕연원 의 근본으로 남의 자식 된 사람이 영원히 본받아야 할 귀감 이라고 생각하였다. 효에 관한 지언(至言)과 격론(格論)은 『효경』 이외의 다른 경전에도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각 서 에 산재해 있어 계통이 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모두 뽑아내어 질서를 바로잡고 조리(條理)가 정연한 책을 만들 어 후학들이 효에 대한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편술했다. 예의유집 서문(국립중앙 도서관에소장되어있다.) 저서예의유집(禮疑類輯)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