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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24년 6월 Column 명사 칼럼 작은 소리 큰 울림 로 및 소양강다목적댐 건설 등 한국의 중요한 국책사업에 유용하게 쓰였다. 한일수교는 이 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외교활동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한·미·일 3각관계로까지 이어져 북 한을 포함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 한국의 기업들은 ‘캐치업(catch-up)’ 이론을 받아들이고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 기업들을 ‘따라 잡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결과 오늘날 세계적 기업들로 성장 했다. 그러나 1964년의 시점에서 많은 국민의 눈에 박정희 정 부의 대일외교는 매우 불만스 러웠다. 우선 쿠데타로써 제2 공화국을 붕괴시킨 박 의장은 1963년 10월의 대통령선거 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2월에 공식적으로 박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민간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일본과 의 수교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 는데, 그사이의 대일외교는 비 밀에 둘러싸였기에 대다수 국 민은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 었다. 합헌정부의 비밀외교라 고 해도 의혹을 갖게 마련인 데, ‘비합헌 군사정부’의 비밀 외교여서 의혹은 증폭되지 않 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거 래가 있었던 것일까? 국민이라면 누구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 정치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쏟아진 건방지면서도 무례한 발언은 국민을 크게 자극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이 이 제 독립한다고 하니, ‘독립축하금’으로 차관을 준다는 따위의 발언, 그런데도 제대로 한 마디 못하는 박 정권의 대응 등은 국민의 속을 뒤집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식 당일 반대 데모에 나선 대학생들(연합뉴스 제공) 1965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조약 비준서에 서명하는 것을 정일권 국무총리 (왼쪽), 이동원 외무 장관(박정희 오른쪽), 김동조 한일 회담 수석대표(오른쪽에서 두번째) 가 지켜보고 있다(한국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