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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4월30일 화요일 12 (제208호) 기획 계유정난(癸酉靖難)은지금으로부터571년전발생한사건으로1453년(계유년)의일이다.이는세조로즉위하는세종 의차남수양대군이왕위를찬탈하기위하여 세종과문종의고명대신이었던김종서와황보인등을살해하고정권을장악한사건이다.이는단종폐위의직접적 인원인이되었다.그리고단종을복위하려는 움직임은집현전학자들이중심이되어진행되었으나김질의밀고이들은1456년형장의이슬로유명을달리하였고 1691년복관되기전까지후손들은비운의길 을걸었다.1782년정조6년사육신신도비를세우면서이후사육신은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등 6명뿐으로역사는기록되어왔고,현세의우 리국민모두는또이렇게배워왔다.그러나당시단종복위에가담한모든사람들은공초(모의사건의전말)에당당하 게자백하였는데오직김문기만은공초사실 을아니다.모른다하고불복했던김문기의가묘가1978년뛰어들고그뒤에의절사에그의위패가설치되면서혼란 이가중되고편향된역사관과정치적 결단으 로사육신의명예를훼손당했다며그의후예들은절규한다.지난14일일요일사육신공원의의열사에서는사육신의 춘향이‘사육신선양회’주관으로봉행되었 는데당국은왜면하면서이또한후손들을오열하게하였으니그의전말과함께의열사그리고사육신을소개해본다 . 사육신의 위패가 봉안된 의열사 춘향이 사육신선 양회 주관으로 봉행된 가운데 이날 행사는 1부 식전 행사로 개회선언, 육신복권 및 제례봉행 경과보고, 회장인사,초모사,참석귀빈및헌관소개에이어2부 제례봉행,3부기념촬영및중식순으로진행되었다. 육신복권 및 제례봉행 경과보고에 김문기 틈입사 건의 내막을 말하는 순간 장내는 오열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가운데 선양회 박성규 회장은 역사의 현장마 다당대에요구되는그시대의정신이있고,그정신의 정당성을 놓고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대립으로 역사 는엮어지고있다.모순되게도세조자신조차‘성삼문 등이당세에는난신이지만후세에는충신이리라’하 며 부끄러움을 뉘우치듯이 오늘의 반역이 훗날 충의 (忠義)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며 사육신의 충의정신을 소개하고삼중신(三重臣)의한사람인김문기의추가 가묘설치와 위패 봉안에 대해서는 ‘김문기의 행적은 인정하되, 사육신은 그대로다.’라는 역사편찬위원회 의어정쩡한결론을반박하고조선의역사와상관없는 배경과권력자의권력남용이작용한일련의사태에대 해꼬집고,목숨을버리며충절을지킨사육신이나.부 귀영화를마다하고평생을수절한생육신들의의리는 오늘날도탄에빠진나라를위해일하겠다는위정자들 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교시이자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할덕목이아닐까싶다며일침을가했다.추모사는 지 난1995년낭독하려작성하였으나김문기후예들의물 리적 방해로 춘향제가 무산되면서 낭독하지 못해 이 날천령유씨대종회유두철회장이대신낭독했다. 제향에서는 사육신 선양회 임원으로 충정공파대 종회사무국장을맡고있는박기형집례관의창홀에 따라 엄숙한 분위기 속에 선양회 박성규 회장이 초 헌관으로 분향과 헌폐, 헌작하고 선양회 전례위원 유동열(柳東烈) 선생이 독축하였으며, 이어 문화유 씨대종회 임원 유안중(柳晏重), 창녕성씨회곡공파 성하국(成河國)회장이 각각 아헌과 종헌관으로 헌 작하면서40여분에걸쳐진행되었다. 이날제례는당국의무관심속에의열사문이열리 지않아제향 전가까스로 열렸으며,제반준비 또한 선양회에서준비하여충신에대한당국의처우와행 태는꼴불견이라며참석한시민들은성토한다. ▲박팽년(朴彭年)先生 1417(태종 17)∼1456(세조 2) 本 順天. 字 인수(人쑴 ),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 正). 1434년(세종 16)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 1438년 삼각산 진관사사가 독서, 1447 년 문과중시에 급제. 문종이 죽 기 전, 그를 비롯하여 황보인·김종서·성삼문 등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 고명.1453년(단종 1)우승지·부제 학을거쳐1454년좌승지·형조참판.1455년충청도관 찰사로나가있을때,수양대군이단종을폐위시키고 왕위에오르자세조에게올리는문서에는신臣이라 는 글자 대신 '거(巨)'라는 글자를 쓰고 녹봉에도 일 체 손을 대지 않았다.1456년(세조 2) 다시 형조참판 에 기용.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가 밀고 되어, 심한고문을당하고옥사하시다.육신중유일하게박 비(朴婢,성종이一珊이라명명)를종손으로이었다. 유시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 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向한 일편단심 (一片丹心)이야그칠줄이이시랴 ▲성삼문(成三問)先生 1418(태종18)∼세조2년(145 6)本昌寧.字謹甫,訥翁,號梅 竹軒.諡號忠文 세종 17년(1435) 생원시 합 격, 1438년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 1442년 삼각산 진관사 사 가독서,1447년문과중시에장 원,훈민정음 창제 때 명나라를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을 배우 고 연구하는 등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수 양대군이단종의왕위를빼앗자예방승지로서“국새 (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 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 어도 늦지 않다”고 다짐하며 단종 복위 운동을 박팽 년과 주도, 모의가 탄로되어 모의자들과 함께 고문 을당하고환형효시되시었다. 奉祀孫:1903(고종40년)성교운의자周英을사손 으로정하였다. 유시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蓬萊山)제일봉(第一峰)에낙락장송(落落長松)되 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한 후에 독야 청청(獨也靑靑)하리라 ▲이개(李塏)先生 1417(태종17)∼1456(세조2) 本 韓山, 字 靑甫, 伯高, 號 白玉 軒,諡號忠簡. 공은 고려 충신이며, 조선 성 리학의 주류를 이루신 牧隱 李 穡 先生의 증손이다. 1436년 문 과급제, 1442년 적장랑으로 明 皇戒鑑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 정음 창제에 참여하여 공을 세 움,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 호당에 들었고,직제학 에이르렀다.1456년단종복위모의에가담하였다가 모의가탄로되어혹독한고문을받으시고환형효시 되시었다. 奉祀孫 : 1903년(고종40년)이용직의 상소에 따라 이두복의2자중원(重遠)을사손으로윤허 유시 : 방안에 혓는 촉(燭)불 눌과 이별(離別) 하 였관 대 눈물을 흘리면서 속 타는 줄 모르난고 우리 도져燭불같아다속타는줄모르노라 ▲하위지(河緯地)先生 1412(태종12)∼1456(세조2) 本晉州,字天章,仲章,號丹溪, 諡號忠烈. 1435년 생원 합격, 1438년 식 년 문과 장원, 사가 독서. 1444 년 집현전 교리로 五禮儀註 상 정에 참여, 1451년 歷代兵要 편 찬에 참여했는데 수양대군이 총재 하였고 1453년 역대병요 가간행되니수양대군이단종에게가자할것을주청 집의로 승차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계유정난으로 수양이영의정이되자벼슬을버리고선산고향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수양이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입조 하지않았다.1455년세조가예조참판으로부르니마 지못해입조하고녹을먹는것을부끄러워했다.녹을 받는대로별실에쌓아두기만했다. 1456년단종복위모의에가담하였으나계획이탄로나 세조가문초할때“이미반역죄로정해져서사형을받게 된바에야새삼물을것이무엇이있느냐”고대답하니세 조가누그러져낙형을면했으나환형효수되시었다. 奉祀孫:1705년(숙종31년)예조판서민진후의고묘 에 의해,그의 아우 소지(紹地)의 아들 귀동(아명)원 (源)을봉사하도록주청함에계절(繼節)케하라윤허. 유시:사나이먹은마음성공실패고금같고백성 위한임금분명한분뿐도롱이를보낸뜻응당알만 하오성사뒤세상조용하면함께즐기리라 ▲유성원(柳誠源)先生 ? ∼1456(세조 2) 本 文化, 字 太初, 號 琅갰 , 諡號 忠景. 1444년(세종26)식년문과에급제,1447년문과중 시에 급제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1452년 문종 즉위 후 사경, 수찬, 대교를 역임, 사가 독서했다. 1453년 단종즉위년 10월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쥔 수양대군 이 그 훈공을 교서로 작성하려 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 망쳤으나 유성원이 마지막에 잡혀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가 통곡했다. 1456년 단종 복위 모 의에 가담하였으나 탄로되어 성균관 사예로 성균관에 있다 가 집으로 돌아가 부인과 이별 주를 나누고 사당에 들어가 패 도로목을찔러자결하시였다. 奉祀孫:1902년(고종40)문중의품처에따라유동 협의아들기찬(基纘)을사손으로윤허 유시 : 바다를 끌어들인 마천령산맥에 땅을 가로 지르는 두만강 물줄기 어라 이곳에서 힘찬 말 달려 놓고오랑캐항복받던그모습눈에선하네 ▲유응부(兪應孚)先生 ?~1456(세조 2년) 本 川寧, 字信之,善長,號碧梁,諡號忠 穆. 무과급제,1449년(세종31)咸 吉道 慶源都護府使, 1455년(단 종3년) 판강계도호부사, (세조 1년) 동지중추원사, 1456년(세 조2년)별운검. 단종복위 모의에 별운검을 기회로세조주살임무를맡았으나탄로되어국문을 받을 때 세조에게 “잔칫날에 일척 검으로 족하를 폐 위하고 고주(단종)를 복위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간사한인간때문에발각되었으니응부가다시무엇 을 하겠소,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시오”피부를 벗기 고 배를 지지는 등의 모진 고문에도 불복하고 의연 히죽음을맞았다.환형효수되시었다. 성품은 효성스러워 노모를 위로하는 것이면 무엇 이든 하였고, 청렴하기는 제나라 오릉증자(於陵仲 子)와같았고,방문을거적으로치고살았다했다. 奉祀孫 : 1811년(순조11년)경기유생 이유제의 상 소에 兪大根을. 2차, 1822년 (순조22) 兪顯文을. 3차, 1904년(고종41년)兪鎭三을입후사손승계윤허. 유시 : 장군부절 지니고 변방 오랑캐 진압하니 모 래바람부는변방티끌조차가시고병사들은잠들었 네,준마 오천은 버드나무 아래 울고 날쌘 매 3백 마 리수루앞에앉아있네. △사육신선양회발족의취지와경위 지난 1978년5월에 노량진사육신묘가 성역화되는 과정에서,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김모 씨가 자 기의직조이며삼중신의한분인백촌김문기선생을 사육신의반열에끼워넣으려는불순한저의로,서둘 러백촌의가묘를육신묘역에봉축하고,일부몰지각 한 언론인과 사학자들을 회유 협박 매수 등의 방법으 로 사주하여, 500여 년간 한결 같이 충절의 표상으로 숭앙 되어온 사육신의 구성과 정통성을 당치않은 억 설과추론으로왜곡호도케하므로써,십수년래백촌 선생을 주향으로 받드는 이른바 사칠신 제를 거리낌 없이 감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곡학아세가 예사로운염량세태라할지라도,이런일이어찌우리 의 수도 서울에서 용인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없는일련의작태가통탄스러울뿐입니다. 그동안천박한식견과강요에의한일시적현상이 려니 하고, 그들의 자성과 시정을 촉구 해왔던 우리 정통사육신의후손들은이제더이상은인자중하며 관망만 할 수 없는 사태임을직시하고,지난1994년10 월 5일 육문 대표 회의를 열어 정식으로「사육신선양 회」를발족시켰습니다.그리하여우선잠정적인임원 선출과 함께 다음과 같은 발기 결의서를 채택하고, 오도된역사적진실을밝혀민족정기를바로잡기위 한힘찬첫걸음을내디뎠습니다. △사육신의거의전말 1.병자사화丙子士禍의시대적배경, 조선은개국 초로부터왕위계승을둘러싼왕자간의골육상쟁이 빈발하더니,마침내제7대왕인세조2년6월에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사상 유래 없는 대 참극 이빚어지기에이르렀다. 조선왕조 500년간 문치와 무공의 눈부신 성과로 전성기를 이루었던 제4대 군주 세종대왕이 재위 33 년 만에 승하하고 세자인 문종이 즉위하여 부왕의 유업을 계승하였으나,본시 병약했던 그는 재위 3년 만에 승하하여 겨우 12세의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조정의 안팎에는 불안한 공기와어두운그림자가드리우기시작하였다. 선왕의 고명을 받아 유주(幼主) 단종(端宗)을 보 필할 중책을 맡은 이는 고명대신인 영의정 황보인 (皇甫仁)·좌의정 김종서(金宗瑞)·우의정 정분(鄭 )을 위시한 원로급 중신들과 집현전 학사인 소장 문신들이었다.그러나 원로대신들은 나이가 이미 칠 순의 고령에 속하여 정치문제에 왕성한 정력을 기울 일 수 없었고, 또 소장문신들은 아직 관직이 낮아서 국가대사에직접참여할수있는처지가못되었다. 이러한 판국에 단종의 숙부들인 7대군은 각기 세 력이 강성한 중에 특히 첫째 숙부인 수양대군 유(王 柔)는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야심가였고, 둘째 안평대군 용(王容) 은 풍 류에만 몰두하는 호사형으로서,이들 2대군이 왕자 의 신분을 배경으로 각축을 벌리는 형세였다. 그리 하여조야의많은고관들과문인학자들은안평대군 을지지하게되고,낙척불우(落拓不遇)한모사와무 뢰배무인들은수양대군을추종하게되었다. 단종 원년 10월, 드디어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자 들은 재빨리 기선을 잡고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 難)’이란 정변을 일으켜 선대왕의 고명대신들을 남 김없이 살해하고, 친제인 안평대군 용을 ‘도당을 모 아 불괴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유배시켜 사사하였 다. 그런 다음 스스로 영의정에 이조판서겸 내외병 마절도사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독점하고, 정인지 (鄭麟趾)·신숙주(申叔舟)·권람(權擥)·한명회(韓 明澮)등심복들을요직에배치하였다. 이렇듯급변하는정국의소용돌이속에서,궁지에 몰린 단종은 재위 3년 만에 선위란 미명하에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허울만인 상왕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당시 조신들은 수양 일파의 위세 에눌려감히항거할의사를가질수도없었고,또조 금이라도항거할듯싶은인물로지목되기만하면즉 시살해제거되는형편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교활하고 강폭한 수단과 방법으로 왕위를탈취하다시피한패륜적반역행위는절대다 수의 백성들로부터 지탄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양식 있는 조야 인사들의 분노와 의거를 불 러일으키지않을수없게하였다. 2.단종복위계획, 지난날세종과문종의특별한은 총을 받은 구신들 중에 시세 따라 종사하는 아유구용배 (阿諛苟容輩아첨하며구차스런모습)또한적지않았 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 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절의파 학사들과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박쟁 (朴 )등비분강개의무신들이은밀히회동하여상왕 단종의복위를꾀하면서그기회를엿보고있었다. 세조2년병자6월1일,세조는상왕과더불어창덕궁 에서연회를베풀고명나라에서책명사로나온윤봉과 김흥 양사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성삼문 과 박팽년은 연회장의 일을 맡고 유응부와 성승·박쟁 이 별운검을 서게 될 때, 세조 부자를 한꺼번에 참살하 고단종을복위시키려는모의가수립되었다. 그런데 거사직전에 공교롭게도 왕명에 의한 갑작 스런 별운검의 제폐와 공모자 김질의 고변으로, 모 의전모가들어남으로써상왕복위계획은완전히실 패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주모 급 연루자들은 모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혹은 옥사하거나 능지처참의 참형에 처해지고,직계존비속까지 연좌 처형됨으로써사실상멸문지화를면치못하였다.또 한여파는상왕단종에게도미쳐일조에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이듬해 멀리 영월로 강제 유배된지 3개월 만에기어히살해되는비운을당하였다. 세조실록에는주모급17인,연루자100여명,희생자1 0,000여명에이른다고적혀있으니,그야말로공전절후 의 대 참사이기도 하려니와, 이 끔찍한 사건을 가리켜 ‘병자사화’ 또는 ‘사육신의거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이 무렵거사모의에는직접가담하지않았어도,세조와그 일당들의흉악한패륜행위에분개하여세상을등지고 미친체하거나산야에피하여은거한사류들이적지않 았다.특히그中에서도매월당김시습을위시한추강남 효온·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 등이 그 대표적인 인 사들인바,이들을가리켜사육신의 대칭인 생육신이 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추강 남효온은 후일 병자사화의전말을소상하게밝힌‘병자육신록’을찬 술하였는데,이‘육신전(六臣傳)’은당시의사실을올 바르게 평하고 서술한 유일본이라 할 수 있으며, 어 용사가들이 멋대로 써놓은 ‘왕조실록’은 기실 준신 (準信기준에맞춰믿음)하기어려운대목이적지않 다고하지않을수없다. 임금이 사정전으로 나아 가서 이휘를 인견하고,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또 박팽년 등을 잡아 와서 국문 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를 물으니 朴彭年 이 말하기를, ‘成三問븡河緯 地븡柳誠源븡李塏븡金文起븡成 勝븡朴 븡兪應孚븡權自愼븡 宋石同븡尹鈴孫븡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하였다. 다시물으니,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 으니,대답하기를,‘성승븡유응부븡박쟁이 모두 별운검 이되었으니,무슨어려움이있겠습니까?’하였다. 그시기를물으니 대답하기를,‘어제연회에그일 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관가 할때 노상에서거사하고자하였습니다.’하였다. 이개에게곤장을치고물으니,박팽년과같이대답 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에 승복하였으나, 오직 김문기만이불복하였다.(餘皆服招唯文起不服)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류성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 러 죽었다.(이 기록은 일부만 발췌된 것입니다.) ※餘皆服招唯文紀不服 -가담한모든사람들은공 초<모의사건의전말>에당당하게자백하였는데,오직 김문기만은공초사실을아니다,모른다,하고불복했다. 즉김문기는가담하지않았거나,묵비권이나모르쇠로 발뺌하고육신들과는관계없다는것을기록한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육신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바 있다.그런데 1978년 5월18일,백촌 김문기의 가 묘가 뛰어들어 조성되고 의절사에 그 위패가 사육 신 신위와 나란히 설치되면서 칠육신이라며, 그의 후손들은 사육신의 제향을 방해하면서 온 국민의 시선이집중되었다. 2011년 8월 1일 사육신현창회 이사장 및 이사(김 문기후손3명등)를제사방해죄로고발,2014년3월1 4일 대법원판결로 피고소인 및 추가 피고소인 모두 유죄확정을받음으로서사육신선양회주관제향을 올릴수있게되었음에도여전히행정관청에서는사 육신선양회사업에제동을걸고있으면서백촌김문 기를 위한 제사에는 적극 지원하고 있는 실정에 있 어원망이하늘을찌른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여전 사육신에 김문기 를 포함하지 않고 있음에도 역 사를 왜곡하면서 까 지 김문기를 의절사에 배향한 의도는 막강한 권력 의 힘이라고 비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500여 년 간 역사의 오류를지정한사실이없음에 도이를 번복하려는의도는분명 또다른거짓을 양 산하게 될 것이기에 지금이라도 역사의 순리를 따 르는것을권해본다. /글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 단종절신사육신과노량진의절사(義 節祠) 선조 유지를찾아븣 사육신추모제향 지난14일사육신의위패를봉안하고있는노량진의열사에서사육신을추모하는제향이봉행된가운데참례한제관이한자리에모 였다.사진앞줄왼쪽부터박성규초헌관유안중아헌관 성하국종헌관,박기형집례관유동열축관순. 독축광경,맨오른쪽김문기의위패는열리지않았다. 사육신약전(死六臣略傳) 현창및추승사업 병자사화의개요 단종복위모의사건실록과틈입김문기 맺음말 사육신 틈입사건의 진실 을 역사고증과 함께 밝히 고 ‘사육신공원의 불편한 진실을말한다’를펴낸저 자 최종인 선생이 성삼문 의 아버지 성승의 묘표가 현 김문기 가묘자리에서 이전된사실을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