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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월31일 일요일 12 (제207호) 기획 박병립고문과이육주여사는부부이다.학교법인육주재단의이사장으로더알려졌다.밀성박씨대종회고문으로 숭덕전예빈관,밀성재정당,은산부원 군파추원재,순찰사파모원재,임란의병장으로병조참판에증직된운암박대복선생의재사운암정등곳곳에흔적 이남아있다.90세가넘어서도손수 목 재도색을하는가하면용접과미장일을하였다.어느해겨울이었다.찬바람이살깃을파고드는추운날씨에대구동 구신암동의2층집,구정을보내고인 사차집안을들어서면서놀라움을금치못했다.학교법인육주학원재단이사장으로부유할것이라는편견은빗나 갔음을금방알수있었다.신발장에놓 인구두는정주영회장을능가한다.또,추운겨울이지만난방비를절약하기위해냉기가흐른다.그러나거실장식장 과집안에산더미처럼쌓인감사패와 각종기념패,훈장,전직대통령들과의기념사진등은박병립이사장이살아온삶을엿볼있었다.2020년11월한세기 를건강하게살아온고문의장수를축 하하고효(孝)나눔문화를확산하기위해밀성재정당에서청년들은백수연을마련하였다.'천제가경륜을이기지못 하고경륜이연륜을이기지못한다'는 말이있듯청년들은높은연륜과경륜에서나오는고문님의삶을거울삼아더욱더정진할것을다짐하는자리가되어 더욱의미가깊었다.그리고지난2월 10일박병립고문이향수102세의일기로영면하였다는부고는큰충격을주었다.부음을들은대종회임원진과청년 회임원진들은빈소가마련된대구 파 티마병원에속속도착애도하고고인의정신을잊지않겠다는다짐과함께추모에이르러이번호에서박병립이육주 두부부의삶을소개해본다. 달냇골은대구광역시달성군다사면달천동(達川 洞)의옛이름이다.이마을은대구의서쪽에위치하 고 있으며 마을 뒤에 박산(朴山)이 있고, 마을 앞쪽 으로는 금호강이 흐르므로 달내 또는 달천, 달냇골 이라불리어내려오고있다. 1922년 여름, 박병립(朴炳立)은 가난하지만 정직 하고 신용 있는 농사꾼 아버지 박범이 公과 착하고 남편 뒷바라지를 잘한다는 어머니 이두남 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밤처럼 야물고 똑똑하다”며 달냇골에경사가났다며모두들축하해주었다. 그러나 당시는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바로 3 년 후이기에 일본인의 압박은 모두의 살림을 점점 어렵게 하고 있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남의 땅 소 작으로끼니조차이어가기힘든시기였다. 세살되던해부터아버지는농한기에는일거리를 찾아 경남 밀양, 경산 자인 등지로 집짓는 미장일에 몸담아야했다.성실하고손재주가뛰어나어머니도 ‘입벌이’를 위해 어린 아들을 업고 따라 나서면서도 임시로 거처하는 방에서 이것저것 가르치고 글자도 익히는데 힘썼다. 그리고 어느 날 밀양장에서 ‘천자 문’을 사와 밤마다 어린 아들을 가르쳤다.다른 아이 들은 학교나 서당에 나가 공부를 베우는데 어려운 형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농사철이면 현장 일거 리가 없어 고향 다사에 가서 농사를 지었는데 잠깐 서당에 다니는 어린 병립은 훈장의 칭찬을 독차지 할정도로공부잘하는총명한아이였다. 그러나형편때문에학교에들어가지못하고11살 이 되어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을 배웠다. 달천서 당에하루도빠지지않고1년을다닌병립은또래아 이들보다 앞서갔으며 동몽선습을 독학으로 해나간 다니달냇골에장차큰인물이날거라며떠들썩했다. 가난한 형편에 아이 교육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을떠나경남밀양으로이사하여셋방에서생활 하며 책을 읽고,쓰고,외워나가면서 ‘아버지의 힘든 일’을 행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여름이 되 어홍수로낙동강이범람하면서밀양이물바다가되 어 경북 경산으로 옮겨, 아버지는 건축일이 많아지 면서수입도비교적좋았다. 열두 살 되던 해 아버지 어머니가 늦게 집으로 돌 아와 보니 불이 꺼져 있어 이상한 예감이 들어 방문 을 열고 전등불을 켜자 아들은 구석에 쓰러져 있었 다. 혼자서 온 방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고통에 시달 리다 못해 쓰러진 흔적을 역력했다. 실신한 아들을 업고 경산읍내 병원으로 달렸다. “하늘도 무심하시 지?이토록착하고 착한아들이 이게무슨 변고입니 까?” 어머니는 병원이 터져 나가라 벽을 치며 통곡 했다.뇌막염으로 양쪽 귀가 터져 들을 수 없게 되고 말도잘못하는반벙어리장애자가되고말았다. 사방팔방으로수소문하여좋다는약을다써도고칠 수가없었다.설상가상5년동안병수발을하던어머니 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고향 떠나 밀양에서의 큰 홍수,경산으로옮겨아들을뇌막염으로이젠착한아내 마저보냈으니고향에갈면목이없어아들을데리고함 경도,평안도,강원도로발길닿는곳마다돌아다녔다. 아버지가병립을데리고방랑생활을해오다경기 도 부평에서 자리를 잡았다. 건축 일을 하면서 아들 의장래를위해건축기술을가르쳤다. ‘빠르게,튼튼하게,싸게,성실하게’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평생의좌우명으로삼고평생을살아왔다. 듣지도못하고말도못하지만눈치가빠르고건강 하고 성실하여 누가 장애인이라고 탓할 수 없는 건 강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최고의 기술자가 되는 것 이목표였다. 먼저 대팻날 날 쇠 가는 일부터 시작하여 대패질 하기까지의 요령과 기술을 익히고. 톱질하기, 톱날 세우기 등 목수 일에서 시작하여 흙벽 바르기, 회벽 바르기, 시멘트 배합과 미장이의 토목 일까지 하나 하나기술을익혀나갔다. 본격적으로건축일에뛰어들어인부들은나이어 린감독에다가벙어리장애인이라기술이있으면얼 마나있느냐면서공사판을떠나는인부들도있었다. 그럴수록스스로를채찍하고최선을다했다.말을못 하니대포탄피를주어와종으로대신하였고,오늘의 할 일을 칠판에 써서 지시를 하였다. 이에 인부들은 중간 중간에 한문을 써가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대패질 하는데 가서는 직접 대패질을 해 보이는등늘시범을보이면서인부들은달라졌다. 이육주는 1922년 경남 자인면 서부동에서 가난에 찌든집안의아버지이일준과벙어리어머니박숙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객지에 가 있었으 므로어머니할머니와같이살아야했다. 세 살 되던 해 아버지는 객지에서 이복동생 칠주 를 낳아 집에 안고 왔다가는 말도 없이 나갔다.다섯 살 되던 해에는 또 다른 딸아이를 안고 와서는 도망가 다시피 또 떠났다. 그리고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 셨다는부음이날아와졸지에가장이되어야만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벙어리 어머니, 칠주, 팔주의 똥 오줌 묻은 속옷을 빨아야만 했던 육주, 효녀 심청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다. 마을에서 효녀라며 칭찬 이 자자하다.그러나 11살 되던 해 할머니는 건너 마 을 일본인 집에 애 보러 보내며 입을 덜었다.남들은 학교에 다닐 나이에 남의 집 식모살이라니, 그러나 가난한 집을 일으키려는 마음에 선뜻 나섰다. 사이 짱이라는 일본이름으로 불리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아이를돌보았고집안일도잘해주인부부로부터신 임을 얻어, 아기 돌보는 것보다 가게에 나와 장사를 해보라는말에곧바로장사를배워한국인에게는한 국말로 일본인에게는 일본말로 공손히 인사하고 물 건을 사고 갈 때도 문 앞까지 나가 인사하니 친절하 다는 일본인 주인아주머니도 놀랐다. 2년여의 점원 생활을무사히마치고돌아왔다. 그러나간난한집에소녀가장으로돈을벌어야했 다.일본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는 동네 아저씨에게 사정하여 함께 가게 되었다.나고야에서 생선가게에 취직하여가게일과집안의허드레일까지해야했다. 집안 큰 딸의 죠센진이라는 핀잔과 멸시 모함에 견디 지못하고1년만에돈한푼못받고나와야했다.나 고야공장단지메리야스공장에취직하게되었다. 남들은 2년이 되어도 숙련공이 되지 못하는데 6 개월 만에 견습공에서 숙련공이 된 것이다.특유의 부지런함과 뚝심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공장에서 화재 진압의 공으로 표창장과 상금을 받았으며 진 급하여 반장으로 일하며 열심히 하여 꼬박꼬박 모 은돈은70냥이넘는목돈이되었다.그동안에도수 시로 고향집에 보내 본인은학교를다닐수없었으 나이복동생 칠주와 팔주는꼭공부를시켜야한다 고해할머니는두동생을학교에보낼수있었다. 1938년 여름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공장은 작업 이단축되는등어수선해져고향을떠난지3년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돌아와 할머니에게 약속한 100냥 을 건네며 수의 한 벌 구입하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시라며드렸다. 할머니는그돈으로논네마지기를샀다.고향으로 돌아와서도쉬지를못하고일본인모토야마교장댁 에서일을이어갔다.까다롭기로소문난일본인교장 도그의성실함에놀라워하며신임을얻게되었다. 부산에있는방직공장에서여공을특채한다는말 을 듣고 부산으로 갔다. 조선방직공장(대한방직공 장의 전신) 일본에서 배웠던 기술을 인정받기 시작 했다. 특채된 숙련공이라고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하면서몇개월이되지않아승진하여조장이되었고, 또부여공장,여공장으로승진하여2년만에6천명의 여공을지휘하게된것이다.이때나이열여덟이다. 시기하는사람도많았고도둑으로몰려온갖고문 에도 당당해 곧바로 진범이 잡히면서 누명을 벗어 더욱더신임을더해갔다. 이육주는 공장에서 도독으로 몰려 고문으로 복막 염을 앓으면서 시골의 논을 모두 팔아 병원비로 써 야했다. 퇴원하여 도붓장사를 시작했다. 스물 두살 되던해할머니가병으로세상을떠났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이 되었다. 도붓장사를 한것이벌써5년이되었다.그동안동생결혼할머니 장례 등을 치르고 나니 가정은 더욱 어려웠으나 꿋 꿋하게생계를이어갔다. 병립의 나이도 스물넷이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장애인, 벙어리 아들의 신붓감을 찾는다 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경산 자인에 살 때 교회에 나오던 이육주 처녀가 생각이 났다. 벙어리를 모시고 사는 효성이 지극한 그 처녀 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하는 상상을 하고 교회 에도착했다.육주는목사님댁에서만났다.“육주처 녀 우리집 며느리가 되어 주지 않겠소?” 라며 부탁 했고옆에서목사님이거들었다. “성실하고 착한 육주 성도를 탐낸 것이지 아들이 장애자라 장애자 어머니를 모신 육주 성도가 다른 사람보다 잘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던 것이지”라며 말하는 아버지를 보며 얼굴이 빨개져 그 자리에 있 기가 민망해 자리를 뜨려고 하는 육주를 목사 사모 님이붙잡아혼담이이어졌다. 그러나 벙어리 어머니를 두고 시집을 갈 수 없는 처 지를설명하며못내사양하자병립의아버지박장로 는부천에서서울로또경부선열차에올라경산에서 내려자인까지오는먼길을세번이나와서애원했다. 이에육주는할머니유언“꼭시집가야한다”이생 각났다. ‘벙어리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해주겠다는 아버지의약속에결혼을하게된다. 박병립 부부는 처음 대구에서 건축 일을 했으나 일거리가 없어 경기도 부평으로 갔다. 아버지 박장 로는 아들과 며느리가 하는 건축 일보다는 교회 일 에바빴기에거들어줄형편이못되었다.이에육주는 남편 따라 벌이에 나서 공사판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통나무 껍질도 벗기고 나무도 옮기고 무엇이든지 닥 치는대로해냈다.부부가서로아끼는마음이있었기 에신혼시절이토록중노농을해도마음만은위안이 되었다.공사판일거리가없는날육주는새우젓,굴비 등도팔아보태니어느정도목돈이마련되어생활이 나아져갔다.강원도에서큰공사를맡게되었고,부인 은인부들에게밥을해주는밥장사를하게되어안팎 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그러나 6.25 동란으로 피난길 에 나서 무사히 넘겼다. 강원도에서 번 600만원을 부 평학교 교실 12칸을 짓는데 쓰라고 기증하고 내려왔 다.부부가첫육영사업을시작한것이다. 1951년 1월 4일 피난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 버지와 부부는 경기도 부평에서 6일 뒤늦게 피난길 에 올랐으나 마지막 남행열차가 끊어진지 오래다. 차가운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나흘을 걸어 대전에오니폭격으로완전히폐허가된허허벌판이 었다.어떻게해서든지대구까지는가야한다는일념 으로 걷고 또 걸어 영동을 지나 김천에 도착하니 대 구에 온듯했다. 가까스로 대구에 도착 고향 달천의 친척을수소문하여찾아갔으나문전박대를당했다. 그날부터세가족은빈깡통을주워팔아하루에40 환에서50환을벌었다.야전병원에서버린감자껍질, 채소밭이랑에버려진씨레기를깨끗이씻어서주워 끼니를달래고잠은피난민수용소에서잤다. 피난길에봇짐속에연장이있어요긴하게사용되 었다.방천 시장의 수제비 장사는 줄을 서야 먹을 수 있었고, 신용을 얻어 큰 공사를 하나씩 마무리해 주 니하청도맡게되어목돈이모여피난2년만에대붕 동에판잣집을마련할수있었고,3년만에대붕동에 방 네 개짜리 큰 집을 샀다. 1953년2월4일정부는화폐개혁을발표했다.돈의 단위를환에서원으로바꾸고환율을100대1로낮추 니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큰 낭패를 보았다.그 러나 박병립 부부는 돈이 모아지면 땅을 구입하였기 에땅값은천정부지로올라큰돈을만지게되었다. 당시 신천동 일대에 피난민을 합해 5만 여명이나 사는데식수난으로어려움을격고있었다.한짐에2~ 3백 원씩이나 하는 비싼 물을 사 먹는데 그것도 모자 라매일물난리아니물전쟁이나고있었다.이에부부 는 5개월에 걸쳐 샘을 파는 공사를 하였고, 수질검사 결과 음용수 합격판정을 받았다. 동민들은 환호성을 치면서기뻐했고이를본부부는300만원의거금을들 였어도아깝지않아얼싸안고기쁨의눈물을흘렸다. 이로인해2~3백원하던물값은10원으로내렸고 주민들은 물 걱정이 없게 되자 이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신천 목욕탕을 지으니 마을은 점 점살기좋은마을로변해갔다. 이육주 여사는 목욕탕을 하면서 노인이나 불우한 사람에게는반값으로하여도움을주었고박병립선 생은 건축 일에 전념할 수 있어 장모님 회갑에 맞추 어 자인면에 도서관을 지어 자인의 ‘자’자와 장모님 의이름숙이의‘숙’자를따자숙도서관이라하여기 증했다. 못 배운 설움을 안고 살아왔기에 자신들처 럼 배우지 못하고 배울 기회도 못가지는 농촌의 젊 은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여 새 지식을 쌓아 훌륭한 길로가도록하고싶었던것이다. 1974년 10월 25일 이육주 여사는 저축왕으로 국민훈 장동백장을수상했다.그뒤에는남편박병립이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을 모른 다.’는말처럼부부는가난한농촌에서태어나‘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실한 다짐이 있었다. 근면과 성실 정직한 삶으로 신용을 얻었고 이로 인해 들어오는수입을꼬박꼬박저축하면서큰돈을저축할 수 있었다. 절약을 생활화 한 것이다.‘알부자’ ‘억척아 줌마’소릴 들으면서도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구두 는 정주영 회장을 능가했고, 의복은 남루했으며, 난방 은최소화하면서궁색하다는소리마저들어야했다.이 같은노력이있었기에저축왕이될수있었던것이다. 경산 여중·고, 성신 여중, 상주여상, 대성중·고등 학교 이는 육주재단 소속이다. 성실함으로 수 억원 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던 부부는 아버지가 못다 이 룬 육영사업을 추진했다. 20년 전에 개교한 경산 여 자중학교가살림이어려워폐교직전에있었는데우 연한 기회에 인수를 하게 된 것이다. 학교를 맡자마 자 먼저 땅을 사서 운동장을 넓히고 낡은 교실도 헐 고 새로 짓는데 많은 돈을 들였다.그리고 손수 지었 다. 1972년 박병립은 필성학원 재단 이사장이 되었 다.경산여자중학교와경산여자고등하고의이사장 으로학교발전에온정성을다했다. 당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이사장이 학교 운동장 을고르는데큰돌이나와서힘들게캐고있었다.이광경 을본교사들이거들려고하는데이사장은손짓을해가 면서“선생님들은이런걱정마시고학생들가르치는데 힘써주십시오”“이사장님이일하는데보고있을수있겠 습니까?”“아닙니다.제각기맡은할일이다르니어서가 서학생들이나지도하십시오”라며돌려보내는등학교건 물이나운동장확장에교사나학생들을동원한적이없다. 경상북도 상주시 계산동에 사립학교인 성신 여자 중학교가 개교 9년이 되었는데도 학교 살림이 어려 워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하고 있을 때 하는 수 없이 또맡게되었다.1977년상주여상을세우고1982년에 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하여 명문고를 만드는 데힘썼고,1975년창녕의대성중학교를인수하면서 고등학교를 설립하니 6개의 중고등학교가 되었다. 이육주여사는대성학원이사장이되었다. 1983년 3월 경산의 필성학원,상주의 육주학원,창녕 의대성학원을‘육주학원’재단으로통합하며박병립이 사장이취임하였다.1999년10월1일자로이육주는경산 시점촌동에위치한경산대학교재단이사장의일을맡 게되어평생을학교발전과육영사업에헌신해왔다. 이육주여사는박병립이사장이종중에지원사업 을 할 때 묵묵히내조해왔다.경주숭덕전예빈관,밀 성재 정당, 은산부원군파 추원재, 순찰사파 모원재, 임란의병장 병조참판에 증직된 운암 박대복 선생의 재사운암정에막대한금액을지원했다. 숭덕전 예빈관에 손수 인부들을 동원 함께 목재 도 색을 사재를 들여 하였으며, 밀성재 성역과 사업일환 으로시작된동서재중건비용전액을부담하였다.그리 고 은산부원군의 재사 추원재 중건, 경북 고령의 모원 재중건,8대조부임란의병장운암박대복선생의기념 관건립에는수십억원의사재를들여신축하여현창사 업을펼치려하였으나끝내이루지못해아쉽다. 이처럼 종중의 재사 신축을 할 때는 전국을 돌며 우수한 목재를 구하고 손수 현장에 나와 감독을 하 면서웅장한모습의재사를지어기증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육주 여사는 2010년 2월 26일 먼저유명을달리했다.평생을장애인복지와교육사 업에 헌신해온 그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 태껏고생한것,글로다못써.이세상에서천(賤)하 디 천한 일은 도맡아서 했지. 밥 굶기는 예사고, 그러 나 나는 박씨 집안에 시집와 시댁의 선영에 모든 걸 다하고싶었고그러기에최선을다하는데,지금박씨 후손들은 무엇을 하나 지금부터서라도 선영에 최선 을다하라”하며빙그레웃으셨던일이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박병립·이육주 부부는 인간 상 록수라고,정말 남을 위해 태어난 부부다.평생을 교 육 사업에 헌신하였고, 장애인 노인 요양시설인 마 이홈을짓는등그늘진곳을찾아헌신했다. 노블리스오블리제(NoblesseOblige)는프랑스어로 서'가진자의도덕적의무'를의미하는뜻으로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귀족의 역사가 긴 유럽 사회에서 유래 되었으며 오늘날 유럽 사회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 탱해 온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귀족으로 정당 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노블리스)' 만큼 의무 (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는 귀족 가문의 가훈(家訓) 인 셈이다. 부부는 이를 실천하였으며, 신라왕손으로 그는숭조에대한일념을갖고평생을살아온분이다. 박병립 이사장은 1980년 국립훈장 석류장을 수상하 였으며,1987년새마을훈장근면장,1994년미국피스레 익대학명예교육학박사학위를받았다.그리고같은해 중국연변족노인에게송아지535마리,돼지315마리를 1995년중국단둥시보산촌조선족집단촌에2년생사과 나무6천그루,보산촌초등학교수세식화장실을건립 하고조선족을본국으로초청하여계속지원하기도한 다.이처럼두분의삶은국내외를고루비춰주고있다. 이제 두 분은 가셨다. 박병립 고문과 이육주 여사 의 삶과 철학이 파동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 되길기대해보며고인의명복을빌어본다.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오직남을위해 태어난박병립·이육주 선조 유지를찾아븣 달냇골에 경사났네 2020년밀성청년회주관백수잔치에서아들홍경경산대교수와자부이인혜동구노인복지관장과함께하고있는박병립고문. 201 0년밀성재동서재를중건하여기증했다. 사진은중건착공 고유장면 2010년밀성재성역화사업회의에참석,경내를돌아보고있다. 세상에이런일이븣 미장일을배우다 벙어리어머니가낳은효녀이육주 일본으로건너간소녀가장 소녀가장에서경산대학교재단이사장으로취임한이육주여사 열여덟살에여공장이되다 박병립과이육주의결혼 맞벌이부부 대구에서피난생활 사회사업을시작하다 이육주를저축왕이되게한박병립 6개중고등학교육주재단이사장박병립 숭조사업에매진하다 운암박대복선생기념관건립현장에서청년회선조유적탐방단 을맞아함께하고있는이육주여사 고령에도항상현장에서진두지휘하는박병립고문과이육주여 사가청년회순례단을맞는다.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