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4년1월31일 수요일 12 (제205호) 기획 송월당박호원선생은선조조에호조판서를3차례나역임하고관직에서물러난후에는한번도고친적이없어비가 새는초가에서자손들훈육에정성 을쏟았다.왕명을받고용강현령으로내려가백성들을기근(飢饉)에서진휼하고임술(壬戌,1652)황해도난민을토평 하였고,비변사(備邊司)에있을때 에는임금의명을받고유극량(劉克良)을천거하여임진왜란에큰공을세웠으며,한림학사를지내고도승지를거쳐 호조판서와좌참찬을지내는등벼 슬길에나아가서는청렴으로소임을다하고재야(在野)에서는검소한생활을하면서자손들이본받게함으로서줄 이어대과급제자를배출하여가통 (家統)을잇게하여후세에이르기까지그명성이빛이난다. 특히지극한효성으로어머니장수황씨의묘소에분암(墳庵)망추정을짓고그효를다해후손들에게미치는영향은 매우커소개해본다. 선생의 휘(諱)는 호원(好元)이고 자는 선초(善 初),본관은밀양(密陽)이다.고려때에사헌부규정 (司憲府糾正)을 지낸 휘(諱) 현(鉉)이 파조(派祖) 인데,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대대로 큰 공이 있는 번족을 이루었다.4세 전하여 전서공(典書公) 휘 침 (枕)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하여 벼슬이 전의판사(典儀判事)에 올랐으나 1392 년(공양왕 4) 7월에 이성계(李成桂)가 거사를 도모 하여 새 정부 조선국(朝鮮國)을 개국하여 고려조의 국운(國運)이 끝나자 공께서는 이왕조(李王朝) 섬 기기를부끄럽게여기고고려조의명신재상71명과 더불어 망국의 한(恨)과 슬픔을 간직한 채 송도(松 都·고려국의 도읍으로 지금의 개성)를 떠나 만수산 (지금의개풍군광덕산)으로들어가다부조현(不朝 峴·두문동 72현이 만수산으로 들어갈 때 이곳에다 의관을 벗어 걸어 놓고 넘어갔던 고개라 하여 지어 진 고갯길 이름)에 올라 신조불참동맹(新朝不參同 盟)을맺고조복(朝服)과관대(冠帶)를벗어나뭇가 지에 걸어 놓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불사이 군(不事二君)의충절을지켰다. 전서공의아들휘강생(剛生)의자(字)는유지(柔 之)이고 호는 나산경수(蘿山耕 쑴 )이다. 1369년(고 려 공민왕 18·기유)에 전서공(典書公)과 밀산박씨 (密山朴氏)사이에서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13 90년(공양왕 2) 6월 경오식년시(庚午式年試) 문과 (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에 올라 1408년(조선조 태 종 8)에 진위사(陳慰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 (明)나라를 다녀왔고 1412년(태종 12)에 집현전(集 賢殿)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1414년(태종 14) 수원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1422년(세종 4·임인) 6월 22일 함경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있을 때 졸 (卒)하시니 향년 54세였다. 공은 한 때의 명문장가 (名文章家)로 배불론(排佛論)을 저술한 바 있으며 자손들에게 전하는 장문(長文)의 유서(遺書)가 전 해져 온다.훗날 1424년 (세종6)에 공의 따님 장의궁 주(莊懿宮主)가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귀인 (貴人)이 되자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밀산군 (密山君)에 책봉(冊封)되었고 아들 휘 절문(切問) 은1411년(태종11·신묘)4월6일에문과에급제하여 권지교서(權知校書) 정자(正字)에 제수되었으나 석달뒤인그해7월2일에하세(下世)하였으니22세 의젊은나이였다.훗날에공의둘째아드님중손(仲 孫)이 밀산군(密山君)으로 봉군(封君)되어 귀(貴) 하게 됨에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밀산 군(密山君)으로봉군(封君)되었다. 아들 휘(諱) 중손(仲孫)의 자(字)는 경윤(慶胤) 이며 호(號)는 묵재(默齋) 또는 백당(栢堂)이라 하 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공께서는1459년(세조5·기묘)9월21일에 모부인(母夫人) 왕씨(王氏)께서 하세하시니 풍수 가(風水家)의 말에 따라 원당 선영하 정자공(正字 公)묘소 위에 예장하여 모시었다.공께서는 모부인 의 시묘 살이를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어 고금(古 今)의 사치와 검소의 득실(得失)을 논하여 아들들 에게 경계토록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계주명(戒酒 銘)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한다.공께서 는 1466년(세조 12·병술) 5월 26일에 하세(下世)하 니향년(享年)55세이다.공의부음(訃音)을접한세 조는경순사상왈공(敬順事上曰恭)이요자혜애친 왈효(慈惠愛親曰孝)라는시호(諡號)와함께부조 지전(不 튐 之典)을내려제사토록했다. 아들 우윤 휘(諱) 광영(光榮)도 습봉으로 밀성군 (密城君)에봉해졌는데공의조부이다.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 와홍문관박사를거쳐봉상시주부에전직되었다가 1503년(연산 9)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 고1504년(연산10·갑자)에사간원(司諫院)정언(正 言)으로 있을 때 연산(燕山)생모 윤씨의 추숭을 반 대하여 목천(木川)에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영광으 로이배(移配)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복직되어 1507년(중종 2) 지평(持平), 교리(校理), 집의(執義), 의정부 검 상, 사인을 거쳐 1514년 통례원 좌통례로 평안도 재 상경차관(災傷敬差官)이 되어 다녀왔다. 1516년 승 정원 동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병조참의를 지냈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 돈 령부도정으로자리를옮겼다. 1522년황해도관찰사로있을때간신의모함으로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 1526년 이조참 의, 승정원 좌부승지를 거쳐 1528년(중종 23·무자) 에 한성부우윤이 되고 밀성군(密城君)에 습봉(襲 封)되었다 1529년 동지중추 하정사(賀正使)로 명나 라에 다녀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충청도 관 찰사로나갔다.1532년 호조참판을지내고형조참판 에 이르렀다. 1537년(중종 32·정유) 봄 경주부윤(慶 州府尹)에제수되었으나너무고령(高齡)이라 하여 체직되었다.같은해가을1537(중종32·정유)8월28 일에 하세하시니 향년 75세이셨다. 이조판서(吏曹 判書)에증직되었다. 아버지(고,考)의 휘(諱)는 이(苡)이고 벼슬은 부 정(副正)인데, 공의 추은(推恩)으로 좌참찬(左參 贊)에 증직되었고, 이어서 공의 동생 순원(舜元)이 공신(功臣)에 책훈되자 좌찬성(左贊成)에 더 증직 되었다. 어머니는 두 분인데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장 수황씨(長水黃氏)는 장원군(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소양(昭襄)인 휘(諱) 맹헌(盟獻)의 따님이 고,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 는 군수(郡守) 원신(元信)의 따님이며, 공은 황씨 (黃氏)의소출이다. 선생은 1527년(중종 22 丁亥)10월 18일에 서울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서 5세 되던 해에 어머님을 잃었 다. 명종 원년 병오년(154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 격하고,1552년(壬子)에는 문과에 급제했다.그때에 종형 인원(仁元), 근원(謹元)과 종질 계현(啓賢)이 함께 급제하니 세상 사람들이 사봉(四鳳)이라 일컬 었으니,그명예와사실이이와같이빛났다. 1552년(乙卯)에 관북평사(關北評事)가 되고, 155 7년(丁巳)에는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 고, 1558년(戊午)에는 수찬(修撰)이 되고, 교리(校 理)를 거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수년간 홍문관(弘文館)과 사간원(司諫 院)을번갈아출입하였고,혹은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으로옮기고또관서지방(關西地方)에기근이 심하자 능력 있는 관리를 보내어 진휼하라는 명을 받아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가기도 하였다. 1560 년(庚申)에조정으로들어와세자시강원문학(世子 侍講院文學)이 되고, 1561년(辛酉)에는 의정부(議 政府)로옮겨서검상(檢詳)과사인(舍人)을지내고, 1562년(壬戌)에는황해도의민란(民亂)을토평하여 종사한 논공으로 말이 내려졌고, 좋은 상이 계속 하 사되었다.인견때에공이대답하기를,“도적은백성 들이곤궁하여생기는것인데근래에는해마다흉년 이 들었고, 또 수령(守令)들이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도적의 난이 일어나는 것 입니다. 임금의 교지가 매우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 기시니 지금부터는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 고, 이어서 다시 도적을 잡은 자초지종을 아뢰자 임 금이 술과 상을 내렸다.다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 理)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 人)으로옮겼다가,1563년(癸亥)에는세자시강원보 덕(世子侍講院輔德)겸경구(京口)의장선(粧船)을 감독하는 업무를 맡았으나, 군사에 관한 중요한 업 무는겸하여맡을수없다하여왕명으로강직(講職) 에 체직되었다. 일이 다 끝나자 들어와서 예빈시 정 (禮賓寺正)이 되었고 얼마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직에서 물러났다.1565년(乙丑)상을 마치자 사헌부 (司憲府)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로 옮겨졌다 가, 1566년(丙寅)에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와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1567년(丁卯)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아갔다. 1569년 (己巳)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입직승지(入直承 旨)가 되었다.그때선조가즉위하고상을마치자종 묘(宗廟)에 명종대왕을 부제( 뻤 祭)할 때에 공이 예 (禮)에 어긋난 일에 연좌되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물러났다가,1574년(甲戌)에다시좌승지(左承 旨)에 임명되고, 1575년(乙亥)에는 도승지(都承旨) 가되었다가병조참의(兵曹參議)에임명되었다.157 6년(丙子)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 되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뒤로 예조참판(禮曹參判)과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580년(庚辰)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고, 1 582년(壬午)에는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었다.그때관료들과예(禮)를논의하는중에 양자(養子)를세운뒤에아들을낳았을경우생자가 제사를 받들되 양자도 파양(罷養)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임금도 역시 파양은 난처하다고 하였다. 뒤에 사헌부의 계청(啓請)으로 파직이 되었는데 이 때에는 조정의 의논이 당으로 나뉘어서 동인(東人) 과 서인(西人) 간에 서로 재신(宰臣)들을 배격하여 탄핵받은 재신만도 15인이나 되었다. 공도 그중에 끼었으나 공에게는 다만 임금이 추고(推考)만 하고 그치게 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공의 사람됨을 아 꼈기 때문이었다.그 이듬해인 1583년(癸未)에 다시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에 당론 이다시격화되면서종형인근원(謹元)공이간(諫) 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서인영수(西人領袖)에게까 지 저척( 쾡 斥)되어먼변두리로유배를가게되자공 도그말에서용서받을수없는것임을스스로더잘 알게 되었다. 일찍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보령 현(保寧縣)에다다랐을때에경치가좋은곳을찾게 되었는데그곳을가오대(駕鰲臺)라한다. 공이이곳 에서 시 한 수를 지은 일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전송 (傳誦)되고 있으며 그 말련(末聯)에는 창주옥수연 (滄洲屋數椽:푸른강가에조그만집한채)이라는말 이있는데,높은 벼슬에얽매어있지 않는청아한 뜻 을 엿볼 수 있다.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에 있을 때 임금이 인재를 골라 천거하라는 말씀이 있어, 공 은 특별히 장군(將軍) 유극랑(劉克良)을 천거하였 는데, 과연 임진왜란 때 절개를 세웠으니 공의 사람 을알아보는안목역시대단하다고말할수있다. 관직에있을때는청렴하고검소하였고,관직에서 물러나니 겨우 초가집 십 수 칸이었고 그 집도 처음 과 같이 고친 일이 없었다.1584년(甲申)4월 2일(旁 死魄)집에서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8세였다.임 금이 부고를 듣고 크게 애도하여 의정부 좌찬성(左 贊成)에증직하도록명하고품계는종일품(從一品)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질(家秩)되었으며, 경기 도두응촌선영에예장(禮葬)되었다.부인광산김씨 (光山金氏)는 찬성(贊成) 명윤(明胤)의 따님이다. 법에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칭호를 받았고 돌 아가신후에공의왼쪽에부장되었다. 선생은4남3녀를두었다.큰아들시현(蓍賢)은판 관(判官)이고, 둘째 아들 구현(龜賢)은 참봉(參奉) 이며,셋째아들태현(台賢)은감찰(監察)이며,넷째 아들정현(鼎賢)은판서(判書)이다.큰딸은정랑(正 郞) 윤홍의(尹弘毅)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진사(進 士)임홍정(任弘正)에게,다음은사인(士人)노수열 (盧守悅)에게시집갔다. 선생은 일찍이 어머니이신 정경부인(貞敬夫人) 께서영남(嶺南,경남산청)의친정집에서돌아가셔 서 묘소가 단성(丹城)의 사월(沙月)에 있는 까닭에 망추재(望楸齋)를지어놓았는데,그후자손들이수 시로 왕래하면서 그 동리에 살게 되어서 지금은 망 족(望族)이되어단성일대에큰집성촌을이루고있 어망추정과재사이사재를소개해본다. 이사재(尼泗齋, 경남 문화재자료 제328호)는 송 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 선생의 재실이다. 입 암(立庵) 박헌수(朴憲修)의 기문과 송주(松州) 하 도(河圖)의현액이있다.네모서리에는활주가세워 져있으며외진주는원기둥이고내진주는네모난기 둥이다. 중앙 마루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비워 출입 하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고, 양측면의 방 출입구는 세짝분합문으로구성하였는데세살문형식을보인 다. 재실 서측에는 암반 밑에 얕은 우물이 있고 장방 형의 연못이 연결되어 있다. 이 우물과 연못은 모서 리에 잘 가공된 장대석과 장식 조각이 있어 건립 당 시부터있었던것으로추정되고상량문에‘세정사팔 월’로 기록된 것으로 건립 연대는 1857년으로 추정 된다.재실입구에는1597년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중이곳을지났다는행로표석이있다. 망추정(望楸亭, 경남 문화재자료 제632호)은 선 생이 어머니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다. ‘망추정’이란 이름에는 자식이 부모를 그리워하 고 생각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송월당(松月堂)의 어머니장수황씨가 별세하실 때 공의 나이가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리하여 어른이 된 뒤로 자신이 어려서 모친상을 당한 것을 평생의 큰 한으로 여 겼다. 그런 까닭에 사월(沙月)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정을 늘 가지고 있었으며 성묘를 하러 올 때 마다 머 물려고 하며 차마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는 심정이 었다. 어머니의 묘소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재실 겸정자를건축하여망추정(望楸亭)이라이름하고, 또 약간의 전답을 사서 농막을 지어 하인을 시켜 관 리케 하고 성묘차 왕래 할 때 드는 비용을 충당하였 다. 그뒤충무공이순신장군의난중일기에부임길에 박공의 농막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다고 기록하였 는데바로이곳망추정이다. 1560년경지어진것으로추정되며이후여러차례 고쳐지으면서문중의제사를지내는재실로사용하 였다. 앞면 6칸, 옆면 3칸 규모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팔(八)자인팔작지붕건물이다.대청마루를중 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으며, 왼쪽 끝 방을 제외 하고 모든 방 앞으로 좁은 마루가 설치되어 있다.대 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건물로 문 위에는 ‘경의 문’이라고 적힌 나무판이 걸려 있다. 망추정 오른쪽 으로는관리사가있다.망추정은조선후기전형적인 재실 구성을 잘 보존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 은건물이다 송월당공의생애는충효(忠孝)와지극한애민(愛 民)으로 점철되었다 할 수 있다. 20세에 진사(進士) 가되고명종임자년(1552)에종형인원(仁元),근원 (謹元),종질 계현(啓賢)과 함께 동방(同榜)급제하 는 명예(名譽)를 얻어 세상 사람들이 사봉(四鳳)이 라일컬었다. 벼슬길에나아가나라에어려운처지에는항상선 생이 있어 극복하였다. 1558년 관서지방(關西地方) 에 기근이 심(甚) 하자 능력 있는 관리를 보내어 진 휼하라는 명을 받아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가 진 휼(賑恤)함으로서 민심을 달래었다. 1562년 임꺽정 을두목으로하는도적들이극성하자이들을토벌하 는 토포사(討捕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이들 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는 등 임금을 섬기고 백성 을위하는데전력을다했다. 또 임금께 권선징악을 말할 때에는 진실로 화합 하여보탬이되었고,이어세자를보필하고지도할 때에는 정의에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다.판서를 세 번이나 지냈으면서도 비가 새는 초막에서 자손 훈 육에 정성을 쏟아 백년대계를 세웠다.특히 어머니 정경부인 장수황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망추정을 지어 평생 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효를 다했기 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으로 남는 다. 송월당공의 14대손으로 학교법인 한올학원 설립 자이자 한국평신도 세계협의회 총재로 국제적인 활 동을 통해 가문을 빛내고 송월당과 아들 의곡공, 손 자 의촌공의 유고를 모아 ‘송월당3대’ 로 박영록 성 균관부관장과 공동 편저하여 선조를 현창하고 있는 박우승 박사(장로)는 선조의 음덕에 감사하며 망추 정을 소재로 하는 시(詩) ‘성웅 이순신’을 지었기에 소개하며마무리해본다. ‘성웅이순신’ 누가그앞에서고개를들수있으랴 한국의표상성웅의얼굴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점전 속 생명바쳐바닷길낸살신성인(殺身成仁) 조각배저어물리친수천만적 거북선 용솟음 쳐 호통 친 만 척 적탄맞아마감한생 하늘따라이세상버리신것인가 만백성환호성의뒤안길 자리매김하는큰바다굽이굽이 백의종군종사길단성사월들리시어 내 조모 묘소 찾아 예의 갖추옵고 하룻밤쉬시던사당(祠堂),작전계획세우셨으니 그난중일기한날에떨어지는나의눈물방울 현충사를바라보며곡교천을따라걸으나 같은걸음임의끝자락이나밟을수있을까 발자국흔적보일듯보일듯 내딛는걸음마다명량(鳴梁)이어라 아성웅이시여! 그렇게그렇게도가시리가시리었나 님이없는아산시있을수없고 아산의값진터에님이없을수없어 목매어부르는우리의함성 대한민국만세만세만만세로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송월당박호원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家系) 송월당공묘소,경기도고양시덕양구두응촌제2묘역. 망추정의아름다움을현석이호신화백이화폭에옮겼다. 이사재전경,충무공이순신장군이 1597년6월1일유숙했던곳으로유명하다. 선생의 생애 이사재(尼泗齋)와망추정(望楸亭) 망추재,경남산청군단성면사월리1480 이사재,산청군단성면상동길77.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