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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1월30일 목요일 12 (제203호) 기획 회재박광옥선생은임진왜란당시의병도청을설치하고국난극복을위해활동하였고광주향교향약을재정하여 백성들이사람으로서갖춰야할기 본덕목을지니도록하였다.그리고 개산방죽을쌓아 애민치국을실현하는등자기자신을바치는희생으로후대에 까지그정신과사상이이어지고있 어지난11일광주서구에서주최하고‘기술하다’주관,벽진서원과전남대학교호남학과,전남대호남학연구원의후 원으로광주서구빛고을국악전수 관에서‘선비의일생회재박광옥선생의삶을만나다’주제로학술대회가열렸다. 이날학술대회에는지역유림과후손,주민등200여명이좌석을가득채운가운데오종일전주대명예교수의‘회재 박광옥선생의의리정신과구민의 식’의주제로기조강연에이어박종우(충주박씨)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은븮회재박광옥시의일고찰븯에서뷺그의시세 계는븮즉물적시정과인정에의긍 정븯과븮청정한시경과고독한정신지향븯이라는두가지특징을지닌다뷻며뷺경물과거기서얻어지는흥취를담담하면 서도정감있게표현했고시의청정 한시경이고단한삶의위안을주고재충전하게도와주는역할을하고있다뷻고강조했다. 김경호전남대호남학과교수는븮회재박광옥의가계와인적관계망븯에서뷺회재는일생을사는동안스스로학문을 연찬하면서사핵하고실천하는생 활을했고기회가있을때마다의기투합하는동지를만나우정을나누고사회를통해공감의정서를나누기도했다"며 "그는도학을공부했던학자이자 관료,행정가였고정치인이자교육자로살았다뷻고평가했다. 백옥연(광주광산구청)씨는"서원이포함하고있는많은유·무형의자원,배향인물과연관된유물과유적등인문문 화자원을기반으로한븮서원의6차 산업화븯란개념을도입,활용방안을찾을수있다"며"이를기반으로발굴된콘텐츠를상품화하고브랜드화하는방안 이나와야할것"이라고제시했다. 이에본보는오종일전주대학교명예교수가기조강연에서발표한‘회재박광옥선생의의리정신과구민의식’을통해 회재선생의삶을재조명해본다. 회재(懷齋)박광옥(朴光玉.1526~1593)선생은 중 종 21년에 광주(光州)의 선도(船道) 개산(蓋山)에 서출생하여1592년임진란이일어난그이듬해인15 93년(선조26년 癸巳) 12월에 68세로 서세(逝世)하 였다. 선생이 태어난 때는, 중종 14년의 기묘사화가 일 어났던해로부터,7년이지난시기였다. 그러므로당 시에는 사화를 피하여 산간으로 숨어들었던 사람들 또한 안정을 되찾게 되어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고, 중종조의 조정 또한 환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선생 이 돌아간 1593년(선조26년)은 1592년의 임진왜란 이일어난이듬해로서국가적으로매우위태로운시 기였다.따라서선생은중종조후기의안정기로부터 왜란으로 국가가 위태로웠던 시기에 이르기까지에 그삶을살게된것이다. 선생의 의식과 사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기 위하 여,그당시 사화를 피하여 호남으로 은거하였던 인 물들을 보면, 능주에는 조광조의 최후를 지키고 그 뜻을 계승하였던 양팽손(1488~1545)이 있었고, 동 복으로 귀양을 온 최산두(1483~1536), 그 문인이었 던 장성의 김인후(1510~1560), 담양의 양산보(1503 ~1557), 그리고 정읍의 이항(1499~1576) 등이 있었 다. 이러한인물들의행의는선생의삶을이루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연세로 보면 양팽손은 선생보다 38년, 최산두는 43 년, 이항은 27년, 김인후는 16년이 위였다. 선생은 이분들과연령으로 보면차이가있지만,그시대상 황이나 사상적 지향에 있어서는, 그들의 행의를 본 받고 학문을 계승하고자 하였던 것임을 알게 된다. 다만 그 시대와 환경이 달라서 화를 당하였던 사람 들은 끝내 불의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 고자 하였던 반면, 선생은 국가의 안정기를 맞이하 여 자신의 의지로서 그 이상을 실현하면서 스스로 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것이 다. 그 정신적 맥락으로 본다면, 그 당시 사화의 인물 들이 죽음으로써 그 소신을 지켰거나 그 화를 피하 여산간으로숨어들었다면,선생은시대적안정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교화와 치국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선생은 사림의 이상 을실현하고국가의질서를회복하고자하였던것임 을 알 수 있다. 선생과 같은 시대에 선생과 가까웠던 인물로는 고봉(高峰)과 사암(思庵)이 있었는데 고봉(기대 승奇大升,1527~1572)은선생보다1년후에태어났 고, 사암(박순朴淳,1523~1589)은 선생보다 3년 위 였다. 이분들 삼현(三賢)은 자연히 깊은 신의를 쌓고, 서로 두터운 교유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고 봉과 선생은, 서로의 뜻이 같아서 광주향교를 함께 중수하고 그 내역에 대한 비문을 쓰면서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사암은 선생의 출사를 돕고 선생 또한 조정의모든일들을협의하였기때문이다. 그 학문적 성향으로 본다면 고봉은 인간의 내적 본성인 선(善)의 존재를 구명(究明)하여 이를 어떻 게 발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천착하고 인성의 본질과 그 발현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사암 (思庵)은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치인지도를 실현하 였고, 선생은 향약을 실천하고 향민들을 교화하고, 출사(出仕) 후에는 조정을 섬기고 벼슬아치로서의 직분을다하였으며,수령(守令),방백(方伯)이되어 서는 백성들을 가르쳐 제가(齊家) 치국(治國)의 도 를 실현하였으며, 임진 난이 일어나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구국운동에헌신하였다. 이제 선생의 삶과 그 업적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 저 선생의 청년 시절의 이상과 향촌을 교화하였던 내용을 살피고, 다음으로, 출사 이후 애민치국을 실 현하였던 그 내용과 업적, 그리고 만년에 임진란을 당하여의병을일으키고구국활동에헌신하면서의 (義)를수호하였던절의정신에대한그실체와선생 의활동들을차례로살피기로한다. 선생은초년시절에는향촌을교화하고고을의백 성들을 선도하였다. 선생 30세때,선생이 살고 있는 고을을교화하고백성들에게그가르침을행하기시 작한 것이다. 이는 제가 치국의 기초를 닦는 일이기 도 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고을의 백성들을 교화 하기위한방법으로서향약을제정하고이를실천하 도록한것이다. 향약이란 본래 섬서성 남전현(藍田縣)에서 대충 (大忠)·대방(大防)·대균(大鈞)·대림(大臨)의 여씨 (呂氏) 4형제가 제정하였던 그 마을의 규약에서 비 롯된 것이었다. 이 규정은 그 고을 백성들과의 약속 이었기 때문에 향약이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덕업 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 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의 네 가지의 조목이 었다. 그런데그후에주희가이를보완하여「증손여 씨향약(增損呂氏鄕約)」으로 완성하면서 보편화된 것이다. 향약이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되었던 것은,중종 1 2년에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 「여씨 향약」을 간행하면서부터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향 약의규정을향촌의규약으로삼고마을사람들에게 이를 실현하도록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생 이,그고을에이와 같은향약을 가르치지 않으면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던 그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생은 그 마을의 실정에 대하여 이렇게 설 명하고있다. “땅은 척박해지고 냇물은 흘러가 버려,가뭄이 들 거나 홍수가 일어나면 모두 재앙이 되었다. 그래서 부자는쉽게가난해지고가난한사람은유리(流離) 하게 된다.수십 년 동안 울타리가 무너져서 쑥대밭 이되어버렸으니,보존된것은얼마없다.이렇게되 었으니 늙은이나 어린아이들도 어찌 착한 마음을 잃지않겠는가?게다가 난리와 질병까지겹치게 되 어,예속상교(禮俗相交)는 볼 수도 없게 되어,구차 한 폐풍(弊風)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이러한 때에 이웃과 돈독하게 지내기 않는다면 집안마다 습관이 달라지고 사람마다 마음이 달라질 것이니, 예의염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물며 서로 공경 하고 긍 휼히 여길 수가 있겠는가 걱정하게 되었 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선생이 향약을 시행하고자 하였던 그 의지는 민심의 순화를 통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데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선생은 이 와 같은 환경에서, 예속상교(禮俗相交)가 무너지고 사유(四維)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향약을 시행하여 백성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 마을을교화하게되었던것이다. 선생은예속이무너지면인간으로서마땅히지녀 야할마음,곧염치가없어지고염치가없어지면예 의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였다. 염치란 부끄러워하 는 마음이다. 부끄러워하는 것은,불선(不善)을 보 고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게 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부끄러움을알아야선(善)을실현하게된 다. 선생은 또한 예속이 무너지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할사유(四維)가사라질까우려하였다. 사유 (四維)란 예의염치(禮義廉恥)로써, 이는 인간으로 서 지녀야 할 최소의 양심이다. 따라서 예의염치를 알아야 부자· 군신· 부부의 도를 실현할 수 있게 된 다. 부자(父子)의 윤리를 바로 세우려는 것은 군신 의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니, 이는 자식으로서의 도 리를다하고나아가신하로서의책임을올바로하고 자 함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생이 향약을 실현 하고자 하였던 그 정신이, 다만 예속상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예의염치를 깨닫게 하고 인간으로서갖추어야할덕목을회복하게하여부자 ·군신·부부로서의그본분을다할수있도록하기위 함이었음을알게된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선생의 의지는 단순한 선 도 마을을 순화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가,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던 것임을 이해할 수 있 다. 선생은 이와 같은 의지에서 초하루마다 고을에 신의(信義)를 가르치고 예의(禮義)를 지키게하여 풍 속을 두터이 하고 인륜을 돈독하게 하도록 한 것 이다. 31세 때는 “개산의 서쪽에 집을 짓고 ‘개산송당 (蓋山松堂)’ 이라 이름을 붙여 스스로 의복을 갖추 고몸가짐을 바로하고,많은 문생들에게날마다성 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날로 많아져서 머물렀던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를 보면 선생의 의지가 향촌의 교화뿐 아니라 후세 의 교육을 통하여 치민(治民)을 실현하였음을 알 수있다. 여기에서 우리는,선생이 그 고을의 백성들을 가 르치고자 하였던 그 의지, 곧 교화의 정신이 어디 에 있었던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거니와, 이는 훗날 광주향교의 중수에 참여하였던 것 또한 이러 한 교화의 정신에 말미암았던 것임을 이해하게 된 다. 43세 때는 개산 남쪽에서 물을 끌어다 정자를 짓 고, 수월당(水月堂)이라 이름하여, 시인 묵객들과 교유하였다. 이 시기에 제봉(고경명高敬命,1533~15 92)과도 깊은 정을 나누었으니 이는 선생이 그 고을 의교화뿐만아니라현인들과교유하고국가의장래 를 우려하여 서로를 격려하면서 백성들의 선도(先 導)에힘썼던것임을알수있다. 선생은 44세에 이르러 중요한 전기(轉機)를 맞 게 된다. 그것은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조정의 내 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除授)받았기 때문이다. 내시교관은 내시부에서 궁중의 예절과 법도를 가 르치는직책이다. 이는선생에있어서는새로운전 기가되었던것으로보인다. 그것은선생이이로부 터향촌의교화를벗어나치국의길로들어섰기때 문이다. 이듬해에는 삼각산, 방장산, 동복의 적벽강 등을 유람하고 고경명 김성원 등 당시 호남의 시인 묵객 들과 널리 교유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고경명과의 교유는 선생이 개산에 있을 때부터 그 우의가 시작 된 것으로써, 이는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자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그와 협력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된것으로보인다. 49세가되던6월에승의랑(承議郞)에오르고종부 시(宗簿寺) 주부가 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보와 선원보첩을 관리하는 부서였다. 두 달 후에는 운봉 현감에 제수되고, 그 다음 달에 별시 문과가 열리자 여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는데, 이는 사암(思庵)의 권유에따른것이다. 선생은 과거에 합격하고 곧 운봉현으로 복귀한 후, 평소에 생각하였던 바의 뜻을 펴기 시작하였 다. 그것은 먼저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이 는 선생이 평소에 생각하였던 이상, 곧 백성을 구 제하고자 하였던 그 뜻을 실현한 것이다. 선생은 평소 백성들에게 베풀고자 하였던 구민(救民)의 정신을 실현하였던 사실을 「연보」에는 이렇게 적 고있다. “선생은운봉현에도착하면서부터진심으로백성 들을 어루만지는 ‘무(撫)’의 뜻을 실현하였다. 이에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여겼다. 또한백성들에게교화를베풀기위하여학교부터정 비하였다. 고을의 옛 학교가 무너져서 비바람을 피 할수없게되자,현의동쪽에새로건물을세우고남 은 곡식 수 백곡을 모아서,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하 게 하고 고을의 어리고 뛰어난 학동들을 선발하여 거처하게 하면서 날마다 학업을 닦게 하고 선생 스 스로 삭망(朔望)에 알성례(謁聖禮)를 행하고 가르 치면서 강규를 세워 함께 실천하니 고을 사람들은 비로소학문을알게되었다.” 선생이이와같은치인지도(治人之道)를베풀수 있었던것은,선생30세때,향약을실시하고삼강사 유(三綱四維)를 가르쳤던 의지, 곧 군신의 도와 부 자, 부부의 도를 세워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깨닫 게 하였던 그 정신을 그대로 실현하였기 때문이었 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러므로 선생이 출사 이전 에 마을 사람들을 이끌었던 그 정신을 그대로 그 고 을에실천한것이었다. 선생이이와같은치적을쌓 게 되자, 재임하였던 5년 사이 백성들에게 감화가 크게 일어나고 학문을 닦으려는 사람들은 날로 많 아졌다. 선생은 50세 되던 6월에 통선랑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고 52세 8월에는 조봉대부에 오르고 춘추관 기 사관을겸하였는데이때운봉에황산대첩비(荒山大 捷碑)를 세웠다. 황산대첩은 이성계가 1380년에 운 봉이황산에서왜적을크게무찌르고거두었던전승 이었다. 선생은 그때 이성계가 운봉 인월에 주둔하 였기 때문에, 운봉현이 대첩을 거둔 장소로서 비를 세워 비전(碑殿)을 짓고 수직(守直)을 두어 전답을 주고관리하도록한것이다. 53세 때는 전라도 도사 겸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 하고 55세에 사헌부 지평.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으 며 56세에 정주(靜州: 영광) 군수가 되었다. 선생은 정주(靜州)에서도 교화를 베풀고 풍습을 일신시켰 으며, 향교를 세워 운봉 현감으로 있을 때처럼 백성 들을교화하였다. 선생은61세때벼슬을그만두고고향으로돌아왔 다. 선생은“언제나온화하면서도엄숙하였으며,문 인들에게 인(仁)을 좋아하고 불인(不仁)을 미워한 연후라야 인의(仁義)를 다 하는 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타이르며 인의(仁義)를 실현한 것을 가르쳤다. 선생은 67세인 1592년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신하로서 백성으로서, 군주와 국가에 대한 의리를 다 하고 이듬해인 1593년 68세로 고종명(考終命)에 이른다. 선생 67세였던,임진년 왜적의 내침으로 전 란을 당하게 되자, 목사 정윤후를 찾아가서 이에 대 한 대책을 논의하고,“적들이 영남을 넘지 못하도록 빠른 병사들로 하여금 요충지를 막게 하면 도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몸소 의 병을 모집하고 군수(軍需)를 조달하여 고경명, 권 율, 김천일 등을 지원하면서 신하로서 백성으로서 그직분을다하였다. 백성들을효유(曉諭)하여안정을찾게하고,흩어 진 군사를 모아 준봉 형제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 게 하여 수원으로 가서 권율과 합세하도록 하고, 또 한 많은 병사들을 운용할 방도를 찾으면서 규합된 병사들을 보내서 담양의 추성관에서 발족한 제봉의 의병과합세하게하였다. 이때모집하였던군사들이 많았으므로 제봉은 담양의 추성단에 오를 수 있었 다. 또한 권율은 선생의 뜻에 감복하고 추모하는 사 업은선생에게위임하였다. 한편 조종에서 글을 보내왔는데 “고경명을 공조 참의 겸 초토사로, 김천일을 판결사로, 박광옥을 창 의사로 나아가게 한 것은 그대들이 벼슬을 받고자 함이 아니었지만, 그 충성심을 생각한 것이니 더욱 힘 써주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선생이 의병을일으킨공로로써창의사로명받았음을알수 있다. 당시에 권율은 독산에, 창의사 김천일은 수원에 주둔하고있었는데,선생은양쪽의군진을접하면서 조정하여 전라도를 방어하였다. 또한 권율의 기세 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승명 처영의 의병을 급히 발진하게 하여 권율의 군대를 돕게 하였다. 이 에 조정에서 나주 목사를 명하였는데,선생은 “국가 가위태로움에처하게되었는데신하로서그책임을 회피할수없다.”라고하며나아가거친음식을먹으 며의병도청을설치하고각읍의지식인들에게격문 을 띄우고 군마와 군량, 무기들을 정돈하는 일을 게 을리 하지 않고 몸소 군사들을 정비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이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백성으로 서 신하로서 그 책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 벼슬을하사(下賜)하면또한그에맞도록직분을수 행하였으니이는나라를지키는일에최선을다하고 자한것이다. 선생은 그러나 임진 난이 일어났던 그 해 12월에, 병을 얻어 병력과 군량을 권율과 김천일 두 의병 진 영으로 나누어 보내고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귀향 할수밖에없었다. 그때,왜적이의주로진격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의병 2천으로 출정하려 하였으나 병 으로인하여병사들을권율과김천일의진영에합세 하도록하고돌아온것이다. 68세 되던 10월에 영면(永眠)하였는데 서세(逝 世)를 앞두고, “나라가 중흥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 이한으로남는다. 사군자(士君子)는마땅히어려움 을 당하여 구차스러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바라는 것은각자자중하는일이다.”라고하고다음날향불 을 피우고 목욕하고 “부모님이 주신 육체이니 경건 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 다. 그 후 선조 32년에 임진 난이 종식되고 35년(1602 년)에는 선생의 사우(祠宇)가 세워졌으며 2년 후에 벽진서원으로명명되었다. 조정에서는선생에대한존경과추모에대한논의 가 이어지다가,숙종 6년 1680년에 이르러서는 경연 에서,“박광옥은명종선조때의사림으로서문과출 신인데대간과시종을지냈다. 임진난때,고경명과 함께 창의하였는데, 사당을 세워 제향을 바치고 있 으니마땅히포장하여야한다고하여사액하도록하 였다.” 이제선생의 생애를 살피면 세 가지의 커다란 업 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첫 번째가 청년기에 향약 을 가르치고 백성들로 하여금 삼강사유(三綱四 維)를 깨닫게 하고 교화한 일이다. 이는 예의염치 를알도록하여사람으로서갖추어야할기본덕목 을 지니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선생이 향약으로서 마을을 교화하였던 것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 본 덕목을 깨닫게 한 것이었으니, 이는 향촌의 교 화에 그치지 않고 올바른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고 자하려는뜻에서였다. 고을의교화는치국의출발 이 되는 것이니 이는 향촌의 교화를 통하여 제가 치국의 기초를 닦고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것이다. 두번째는애민치국의실현이었다. 이는운봉현 감으로서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교화한 것 이 그것이다. 선생은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아전 의폐단을없게하고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가르쳐 서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이는 선생이 향약으로 교화하였던 그 정신을 고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베 풀어,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삼강사 유(三綱四維)를 알도록 하여 태평의 시대를 열고 자 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 생이 30대(代)의 시기에 향약으로서 향촌을 교화 하였던 것이 제가의 실현이었다면 운봉 현감으로 서 백성들을 교화한 것은 치국을 이룬 것이었으니 이는 향촌에 대한 교화의 의지가, 고을, 곧 운봉의 백성들에게 치국의 도(道)로서 실현된 것임을 이 해 할 수 있 다. 세 번째는 위국 충절을 실현하고 고종명을 이룬 것이다. 선생이 그 삶을 마쳤던 당시에는 왜란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명운이 경각에 달려 있었던 때였 다. 그와 같은 국난을 당하여 선생은 백성으로서 벼 슬아치로서그책임을다하고자스스로를돌보지않 고 의병을 모으고 백성들을 구하는데 진력하고, 마 침내 자신을 바치는 희생으로써 그 삶을 마친 것이 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생이 관직을 수행하는 벼슬 아치로서뿐만아니라백성으로서의그책임을다하 고자하였던것임을알게된다. 이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선생의 일생을 살피고 그 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선생의 삶과 그 생애 자체를 이해하고, 지금의 시대에서 우리는 선생의 행의를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이며 앞으 로 그와 같은, 국가의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면 우리 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선생 의정신을본받아야할것이다. 회재(懷齋) 선생의 의리정신과 구민의 식(救民意識) 吳鍾逸(오종일.전주대학교명예교수) 선조 유지를찾아븣 Ⅰ.서론 Ⅱ.애민정신(愛民精神)과향촌의교화 Ⅲ.치국(治國)의실현과그업적 Ⅳ.의(義)의수호자로서고종명(考終命) Ⅴ.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