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3년8월31일 목요일 12 (제200호) 기획 토헌공박초(1367~1454)고려말조선초천지만물을인간중심으로한민본사상을역설하고부국안민을추구한개혁 적인학자관료였다.정몽주의문하에서 수학하여진사시에급제하여고려왕조와도탄에빠진백성을구하려는우국충정의일념으로불교중심사회에서유 교중심사회로전환하여풍속교화와국 가재정의확보를위한불교폐지를주장하였을뿐아니라당시척불에대항하여불교를옹호하는상소를올린전전의 부정김전(金琠)을통렬히비난하여저 자에차렬(車裂)하여마땅하다하고,척불을주장하던정도전에대하여는“이단을배척하고사설(邪說)을종식시켜천 리(天理)를밝히고인심을바르게한동 방(東方)의진유(眞儒)”라극찬하는상소를올렸으나이로인한고초와극형을받고구명되어향리로돌아와흙집을짓 고스스로토헌(土軒)이라자호하고학 문에몰두하였다.그리고조선태조5년(1396)에정시와정종1년(1399)다시중시에높은등급으로발탁되어많은직책 을수행했다.특히조선최초의회례사(1 413)로다녀와왜와교섭창구를개척하고또대명천조진하사(1424),원접사(1425)로외교역량을떨쳤고,훈민정음 창제에도앞장섰다.특히벽골제중수와 해체반대에도적극관여하여선생의지극한애민정신을엿볼수있어소개해본다. 선생의본관은함양으로휘는초(礎)자(字)는자 허(子虛)이고 호는 토헌(土軒)이다. 선원세계를 보 면 신라 경명왕의 아들 속함대군(휘 언신)은 관조이 고누대전하여고려조예부상서휘선(善)은선생의 8세조가된다.고조부휘신유공은이부상서에이르 렀고호남의반적인이연년을토벌하여훈신에책록 되어응천군에봉군되었고,시호는충질공인데관련 사료인 『익재집(益齋集)』에 전투장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전한다.증조부휘지빈(之彬)은문과에장 원하셨고, 조청대부위위윤이고, 조부 휘 리(理)는 문과에 올라 의금부 사 겸 지호례부제주 를 아버지 휘 길중 (吉中)은 문과에 지 군사호부시랑을 지 내고 좌찬성에 증직 되었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무송윤씨 는 부원군 윤공의 따 님인데 후사가 없었 고,증 정경부인 강화 최씨는 직제학 최계 진의 따님으로 선생 께서는 공민왕 시절 정미년(1367)에 전라 북도 김제에서 출생 하였다. 충성되고 현 량(賢良)한가문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찍 부터 시문(詩文)과 예학의 가르침을 받 아 포은 정몽주 선생 을 종유하고 성리학 의근원을깨우쳤다. 1379년 선생의 나 이 12세에 경전과 역 사서를 섭렵하여 시 험과장에 들어서 시 와부에일찍이드물었던초안으로입격하였다. 1380년(우왕6)가을에는초시에합격하였고,이듬해 1981년 봄에는 사마시에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니 나이 15세였다.당시고려에는숭불정책으로불교가융성하 면서 그에 따른 폐단이 뒤따랐다.지나친 숭불의 영향 으로 팔관회(八關會)·반승(飯僧) 등 각종 불사(佛事) 가빈번하게열렸다.거의모든불사는기복적(祈福的) 행사였으며, 그 사회적 폐해가 극도에 이르렀다.이에 선생은풍속교화와국가재정의확보를위한불교폐지 를주장하였을뿐아니라당시척불에대항하여불교를 옹호하는상소를올린전전의부정김전(金琠)을통렬 히비난하여저자에차렬(車裂)하여마땅하다하고,척 불을 주장하던 정도전에 대하여는 “이단을 배척하고 사설(邪說)을 종식시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한동방(東方)의진유(眞儒)”라극찬하였다. 그러나척불상소는결국공양왕의분노를불러일으 켜 순군옥(巡軍獄)에 수감되어 사형될 처지까지 이르 렀으나다행히정몽주·정탁의구원으로사면되었다. 이후선생은흙집을짓고토헌(土軒)이라자호하고은 거하며 마음으로 성리학이 「나란하고 끊어지며 어지럽 고빛나는것」에잠겨,날로정이천형제와주희의서책을 즐겨 느껴드디어찬탄하며말하기를 “숱한 대가(百家) 의 엇갈리고 다름이란 다섯 수레만큼 넓고도 긴요하구 나!진실로사안에따라섭렵하고이끌지못한다면,헛되 이해와달에내던지고집오리가까끄라기에내달려홀 연할뿐인덧을면하지못할터이다.군자가할일이란몸 을닦고임을다스리는방법에대체가있으리라!”하였다. 이에‘大學’한책으로써반복하여깊숙한데를탐구하 였는데 먼저 격물치지로서하고이어참되고 정성스러 운뜻(誠意)과바른마음(正心)으로써앎을다함을겸하 고그것을얻어쌓고갖추어새롭게밝혔다.새로워진신 묘함에이내말하길“옛사람이배움이라면안자가배움 에뜻을둔바이라야하겠고,뜻이라면이윤이뜻을둔바 가되어야한다고말했다.안자와이윤은때에적절함을 이루었으니,어찌반드시박과오이처럼차가운샘에서 먹지도 못하고 긷지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라고 했다. 개연히광택이있게됨에이르러일신을닦았다. 1396년(태조5)임용되어정시에나아가높은등급 으로 급제되어 발탁되었고 1399년(정종 원년)에 다 시중시에발탁되어곧바로시강원설서에제수되었 고좌헌납을역임하였다. 1403년(태종3)에는수찬으로봉직하다가이조정랑으 로옮겼고겸지춘추관기주관사복시첨정이되었다.그 러다돌연사헌부 장령으로옮겼고 교서관판교가되었 다.1404년에는승정원우부승지로승차하였고,대사간으 로옮겨져대간의관료들을이끌고서백성의고통과팔 로(八路)의호포(戶布)를특별히덜어줄것을절실하게 말하였고,또여러신축수재를혁파할것을상소하였다. 1413년(태종13) 6월 수군만호로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그해 11월 복명하였고, 돌아와 전라도수군만호겸지해진군사를역임하였다.1415년 전라도 수군만호로서 관찰사 박습과 더불어 각군민 1 만명을조발하여김제의벽골제를수축하여역사를다 한 뒤에 그 과정을 꼼꼼히 적은 사적비를 세웠다. (영의 정강맹경의지은신도비에는전라도도절제사로관찰 사박습과함께중수하였다.라고기록하고있다.) 1416년(태종16)에는 직제학으로 옮겼고 이듬해 제 주목사에제수되었지만부임치않았고,돌려서의주목 사에배수되었으며,1418년세종즉위년에는다시전라 수군도절제사가되었는데병이나서안가로돌아갈것 을바랬다.그러나임금은이를허락지않으면서“경은 어찌갑계의시구를잊었던가.함께기뻐하고근심하자 고했으니이는한몸을일컬음이었노라”했다.여기에 서임금은상왕을말하고갑계라함은태종(이방원)과 갑계임을드러낸것이다.태종은동갑내기20명에게각 각 찬시를 내렸는데 선생에게는 『충성된 훌륭함과 좋 은명성에조정은기려드러냈으니진실된군자로우뚝 하기가깎아세운기둥이로다!』라고하였다. 이에병을돌보지아니하고관직에나아가성심으 로그직을수행하였다. 1419년(세종1) 병조참의가 되었고 전라도 좌군총제 가 되었다가 또 체찰사와 해도조전절제사에 배수되었 고,다시수군및병마도절제사가되었다.대개그때에 외구의변경경보가있어선생으로하여금그들을막게 하였는데그예봉을껐었다.이때의대마도정벌에대한 조선왕조실록에기록을옮겨당시를살펴본다.「세종실 록4권,세종1년7월7일경술2번째기사」‘정역·권홍·이 종무등을승진시키고,다시병선을거느리고대마도왜 적을 치게 하다’[정역(鄭易)에게 한성 부사를 맡기고, 권홍(權弘)으로 영가군(永嘉君)을 삼고, 이종무로 의 정부찬성사,이순몽으로좌군총제,박성양(朴成陽)으 로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삼아, 동정(東征) 한여러절제사는모두좌목(座目)을올리고,싸움에죽 은병마부사이상은쌀과콩각각8석,군관(軍官)은사 람마다각각5석,군정(軍丁)은사람마다3석을주었다. 상왕이 동지총제 이춘생(李春生)을 보내어 동정군중 (東征軍中)에나가하사한술로제장들을위로하고,유 정현에게일러말하기를,뷺중국으로부터돌아온적선3 0여척이이달초3일에는황해도소청도에이르고,초4 일에는안흥량(安興梁)에와서우리배9척을노략하고 도로대마도로향하니,우박과권만(權蔓)으로중군절 제사를 삼고,박실과 박초로 좌군 절제사,이순몽과 이 천으로우군절제사를삼아,각각병선20척을거느리게 할 것이니, 도체찰사가 다 거느리고 다시 대마도로 가 되,육지에 내려 싸우지는 말고,군사를 거느리고 바다 에 떠서 변을 기다릴 것이며,또 박성양으로는 중군 절 제사를,유습으로는좌군절제사를,황상으로는우군절 제사를 삼아, 각각 병선 25척을 거느리고 나누어 등산 (登山)·굴두(窟頭)와같은요해처(要害處)에머무르게 하고,적의 돌아오는 길을 맞아 쫓으며,협공으로 반드 시대마도까지이르게하라.뷻하고,곧종무이하10장수 에게갑옷과옷한벌을주었다.]※박실,박성양,박초선 생등3인모두가본관이함양으로대마도정벌에혁혁 한공을세웠음을보여준다. 1421년(세종3) 1월 16일 수군 도절제사로 전라도 관찰사장윤화의벽골제와눌제의수축에대한폐지 론에 반박하는 ‘청김제벽골제고부눌제결보물훼소 (請金提碧骨提古阜訥提補決勿毁疎)를 올렸다. 이 소는 태종14년 수리관련 전교의 핵심과 상통한다. 나라를 보유하는 근본으로서의 농사와 농업진작을 위한 실행책으로서 제언사무의 감독이 주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조선전기 수리행정의 담담기관인 제언 사(堤堰司)의설치목적이기도하였다. 1423년에는경상우도수군도안무처치사로부임하 였는데갑자기좌군총제로옮겨졌다.1424년천조진 하사가되어중국수도에다녀갔고,이듬해(1425)조 정에돌아와관서지역안찰사로부임하였고또함길 도와경기도두도의영수(道伯,관찰사)로삼았다. 1427년(세종9)북변에여진의침입이잦으므로조 정에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으로 옮기려하자 이 에반대하는상소를올려부령(富寧)에존속하게함 으로써국토가축소되지않게하였다. 이는 국방의 경계를 줄여서는 안 되며 자주국방을 호소하는것으로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신(臣)신숙 주(申叔舟)·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신 권남(權擥)·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신최항(崔恒)·신어효첨(魚 孝瞻)·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신 이극감(李克 堪)·신양성지(梁誠之)등이삼가전지를받들어이에 첨부하였음을조선왕조실록에는기록하고있다. 1431년(세종13)에 강계절제사가 되었는데 조정은 북 방의근심이있었다.선생께서는문무의재주와덕을갖 추어특별히이직임에배수되었고편이따라조치하도 록하였다.해를념겨과연야인들이란자들은서북지역 을 연이어 침략하여 10여 군이 함락되어 백성들이 흩어 져달아났다.길은끊어지고절단되었는데선생께서행 군함에규율이있고호령은엄하고숙연하니서북의백 성들이 절제할사람을얻었으니그에우리는살았다고 말하였다.몇개의길안에기쁨의소리가우레처럼들렸 고여러진영의성벽과누대의깃발빛깔이한번에바뀌 었다.도적들은기운을빼앗기고그세력이그치어다하 지못해부딪는창검끝에패하여달아났다.선생께서는 여러장수들로하여금뒤를쫓아치게하여도적들은목 숨을버렸고,도망하고부화(附和)하여쫓는자들이다 항복하니천리에걸친군읍이일시에평정되었다.그때 선생에게기뻐하지 않고 선생을시기하는 이들인방어 하고지키는데에실책이있다고하여탄핵하여상주함 을면할수없었기에폄하는것을보았다.그러나이후그 실체의진상이밝혀져돌아다시임용케되었다. 1439년(세종21)에 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차하였으니, 선생께서 가려내어 간언하 고나서공평하고분명(公明)함을드날리기를다했다고 칭송했다.특별히성삼문과신숙주그리고정인지를천 거하여살피고묻는데에예비하였다.여러현인들을끌 어 나아가게 했는데 재목에 따라 임무를 부여할 만한 영 중지사(英俊之士)가조정에가득하여온갖정무를돕고 어울렸다.이때에훌륭함은마주하고모여조야는평안 하고고요했다.선생또한천년만에만난기회로써마음 을다하여국무를 돕고 끌어 올렸다.말할 수없는것을 없게함을알아말이없어도끊어지지않았다.모든정치 를간소하게하고폐단이있는바를한가지에따라서고 쳐서만들었으니임금은 의탁하고맡기어 훌륭하고 소 중한움직임을언제나자문을받았다.임금께서는바야 흐로경전을꽃피어드러냄에공과여러명신들에게미 치어성리학을존숭하였고심히많은것을제작했다. 선생은또한정인지와더불어황찬에게자문을정 확하게받아훈민정음을지어세상에쓰이게하였다. 일찍이문종공김자지는말하길“옛부터나라가다스 려지고편안함이란인륜의기강을밝게닦음에있다.이에 예와지금의충성되고효성스러움을편집하여뛰어나게 법에맞는이는사안에따라기록할만하다.”고하였다.사 람들이보고서말하길박공(토헌박초)이남긴자취는동 방에빛이휘날린다고하였다.선생께서는독곡성석린과 창화(唱和)하여시에말하길“어린시절에듬직한기운무 리에빼어나밝은시절맞아자줏빛구름처럼거닐었거니 에돌아깨어있던노제학을누가알리오앓고있어도도리 어우리임(君)껜기꺼워할뿐!”이라고했다.선생께서는 초서와예서에정묘하였고일찍이손수이시를써서지금 까지전하여사람들의귀와눈에비추인다. 선생은성격이크게조심하는것이었는데비록몸이 쇠약해졌어도삼사민첩하였다.늙어매번조정에들어 섬을 당하여 반드시 여러 관사를 먼저 들러보았고, 또 항상검소하여의복은비단을소중히하지않았고음식 은고기를소중하게여기지않았다.자제를가르치고훈 육함에는편지를보내고오게하며법을이룸이있었으 니손수간단하게예의의뜻을완곡하게다하였다.경전 과역사서를강구하였고게으름을잊어스스로젊었고, 늙음에이르러도일찍이젊음을늦추어지지않았다.검 소한성격은출세하는것을기뻐하지않았고매번쉬고 퇴직할것을구하였으나,임금은심히훌륭한선생의문 무쌍전의 자품(資稟)을 보고서 사퇴치 못하게 하여 90 의나이에가까워서퇴직할것을구하였다. 1454년(단종2)에사저에서돌아가셨으니대개평생 의 자취에 있어 문(文)으로는 극히 지혜를 번득였고, 무(武)로는적을개탄하는바가흡족했다.위로는충성 을다하였고아래로는은혜롭게어루만지고퍼지게하 였고,나아가고 물러섬에는 마땅했다.이는 후세의 모 범이되었으니태찬의말이아니더라도여러명가에쌓 인 문적의 기록된 바다.선생의 부인은 정경부인 무송 윤씨이니판서윤소종의따님이다.아름다운규범이드 러났으니아들의이름은우인데문과에장원했지만불 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떴다. 손자의 이름은 양손인데 문과에급제하고의정부사인이었다.증손자의이름은 배(培)인데광주목사였고,다음이름은돈(墩)인데봉 사주부였고,다음이름은대(垈)인데별시위였다. 선생은어려서가학을배웠고성장하여서는포은정 몽주 선생에게 배웠다. 그리고 성리학의 거두(巨頭)로 성장한다.그러나종유하던포은,야은선생은조선의개 국에 참여하지 않은 고려 절신으로 조선 창업에 동참한 토헌 선생으로서는 미묘한 정치노선의 차이가 있었음 을짐작하게된다.더욱이선생에게유학적학구의기초 를다지게 하였던포은선생은역성혁명파의조선건국 에반대하다가1392년4월이성계의문병차돌아가는길 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 원일파에의해격살당했 다.따라서선생은그처럼 엄청난 정치적 파란 속에 조선 개국에 동참하였으 니, 학문의 스승이라 할 포은선생에대한현창의 소식에 마음이 몹시 무거 웠을것으로여겨진다.그 러기에자신을수양한뒤 에 남을 교화해야 한다고 제시된 수기치인(修己治 人)이라는종래의유학적 슬로건을 맹목적으로 무조건 따르기보다는,깊은 호흡 으로 한 발 더 물러서서 참다운 상황윤리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고민한 듯하다. 결국 모든 세상사에 ‘다스림 (治)’보다더세심하게‘이치(理)에맞느냐!맞지않느냐!’ 하는시의의적실성에착목하여이치에맞게남을대하 고 이치에 맞게 국가 사회에 출사(出仕)하거나 향촌에 거처해야한다는출처관(出處觀)을추스르기에이르렀 던것으로헤아려진다.그에따라선생께서는마침내‘大 學’을 통해 보편적으로 알려진 ‘수기치인’이 아닌,매우 독특한‘수기리인(修己理人)’이라는 좀더세심하고 합 리적인 세계관에 침잠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 국선생이학문의은사이신포은선생의고려절신의길 이아닌,정반대의총체적인사회개혁과대대적인국가 광정이라는논리에따른험난하며비판의대상이될수 도있었던조선건국의과정에정안군이방원을도왔던 행로의고뇌를읽게된다.뿐더러선생께서정안군과동 갑인것이인연이되어,건국혁명동지들과함께갑계성 원으로활약한복잡한속내를어느정도헤아리게된다. 선생은실용주의노선을일관해왔다.그래서마음속 으로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 다.(澤民爲己任,『토헌집』,「추지」)”따라서승불정책으 로인한폐단을없애고대신국가의올바른방책을고민 하는척불소를올렸는가하면벽골제의해체를막는상 소를 올려 많은 양의 쌀 생산에 중점을 두었으며,경원 부의이전을반대하는상소를올려국토의군사방어선 후퇴를반대하는것은물론,국가경영판도의수축을홀 로 조야의 조신들에게 호소하여 단신으로 국정노선의 퇴행을막아냈다.또한「청연병개제소(請鍊兵改制疏)」 등의국방개혁상소를통해서는말로만공허하게떠드 는 과시성 언명이 아닌,전투 함선의 부패와 훼손 방지 를위한기술적조처의제안등세심한부분까지일일이 역설하였으니 선생께서 주창하던 실용주의 국가관리 의한부문이국방을튼튼히하는견실한자주국방과합 리적군무및군비의효율성제고라는측면이강하게뒤 섞여적용된것임에놀라지않을수없다.실로거대하고 지극한애민과충의정신을엿볼수있다. 벽골제(碧骨堤)는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신라 흘해왕(訖解王)21년(330)에처음둑을쌓았으며,길이 가 1,800보(步)이다.』 이후 원성왕(元聖王) 6년(790년) 1월시중종기임명과벽골제를증축하였는데,전주(全 州) 등 7주 사람을 징발하여 공사를 하였다. 고려시대 에도수차중수한기록이전해지고조선조에들어와태 종 8년(1408년) 9월 17일 전라도병마도절제사 강사덕 (姜思德)이 김제군(金堤郡)의 벽골제(碧骨堤)는 뚝 밑이 아득하게 넓고 비옥하며, 제언(堤堰)의 고기(古 基)가산같이견고하고튼튼하니,비옵건대,예전과같 이 수축(修築)하고 혁파(革罷)한 사사(寺社)노비(奴 婢)로둔전(屯田)을경작하게하여국용(國用)에보태 소서.하니,왕이그대로따랐다. 벽골제의중수주역을보면각군에서일만명의민정 (民丁)이 있었고, 중수를 총 지휘한 도 관출척사(관찰 사)박습(함양인)으로부터기록자수군만호박초,전라 도도경력권전,경차관박희중(진원인),차사원김훈,차 사원김방이있었기에가능하였고,1418년(태종18)박초 선생의증언에따르면“공전(公田)의수확이매년천석 이넘었으므로,군민(軍民)의식량이또한풍족하였다.” 라는매우괄목할만한성과로귀결되었다.이에토헌선 생이지은중수기문을일부를인용하여소개해본다. 『벽골제기(碧骨堤記), “태종(太宗) 15년에 경차관(敬 差官)박희중(朴熙中)을보내어관찰사박습(朴習)과더 불어 다시 중수(重修)하 였다.그 비(碑)에 말하기 를, ‘벽골제(碧骨堤)는 그 내부의둘레가7만7406보 (步)이다.5개의도랑을파 서논에물을대는데그논 은 모두 9840결(結) 95부 (負)로서 이는 옛 문서에 기재된것이다.그첫째도 랑을 수여거(水餘渠)-한 물줄기는 만경현(萬頃 縣)남쪽까지 흘러간다.- 라 하고, 그 둘째 도랑을 장생거(長生渠)-두 물줄 기가 만경현의 서쪽까지 흘러간다.-라하며,그셋 째도랑을중심거(中心渠)-한물줄기는고부군(古阜郡) 의북쪽까지흘러간다.-라하고,그넷째도랑을경장거 (經藏渠)- 한 물줄기는 인의현(仁義縣) 서쪽까지 흘러 들어간다.-라 하며,그 다섯째를 유통거(流通渠)-역시 인의현의서쪽으로흘러들어간다.-라고한다.이다섯도 랑이물을대는토지는모두비옥한데,이도랑들은백제븡 신라시대부터백성들이혜택을입어왔다.-신라흘해왕 (訖解王)21년에처음으로벽골제를축조(築造)하였다.- 고려현종(顯宗)때에이르러옛제도대로수리하였고,- 인종(仁宗)21년인계해년에다시증축하였다.-우리성 상(聖上)이을미년봄에관찰사박습등에게명하여수축 하게하였다.이에위에상주하여각고을의민정(民丁)1 만명과간사(幹事)300명을징발,9월갑인일(甲寅日)에 기공하여10월정축일에준공하였다.-이하생략-때는영 락(永樂)13년(1415년)이다.”하였다.』 선생은김제사람으로지극한애민정신과의리사상을 실천하면서도실용주의자였음을엿볼수있다.특히종 문(宗門)의전라도도철책사(관찰사)박습선생과함께 벽골제를 중수하고 중수기문으로 당시의 상황을 상세 하게 후세에 전하였고,1421년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의 폐지론에맞서벽골제의 해체를반대하는 상소를올림 으로서 많은 쌀을 생산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 국방을 튼튼히할수있는군량미를축적하는데크게기여했다. 우리후손들은선현을현창하여후세에전해야하 는의무를가져야한다.이에김제시세계문화유산T /F 팀 정윤순 팀장은 ‘김제벽골제 사료집’을 집대성 하면서 선생의 사적을 세세하게 기록하여 현창하였 고,종중에서는지난4월숭덕비를세우는등현창사 업에매진하고있어다행스러운일이아닐수없다. 정윤순팀장과함께한박형식토헌공종중의도유사 는 벽골제로 인해 생산된 쌀이 전국 생산량에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고 김제 출신으로 쌀농사의 중요성을 인 식하고 벽골제 해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척불 소에서도 밝혔듯 ‘불상과 놋그릇은 군기시에 속하게 하여 병장기와 갑주(甲胄, 갑옷과 투구) 수리하는 데 쓰고’라고 하고 있어 내적으로는 백성의 삶을 윤택하 게하고외적으로는국방을튼튼히하려는선생의깊은 뜻을우리는헤아려야한다고전하고있다. 1684년 박습 선생의 12世 상화(尙和)박초 선생의 10世수대(秀大)는함께중수비를중건하는등우호 를돈독히해왔다.그러나최근들어양가문의이해 충돌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는 역사서(조선 왕조실록 등)가 증언하고 있어 양 가문이 중수비각 을중건하였던그때의정신을되새겨보기를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강맹경의 신도비문, 정윤숙편저‘김제벽골제사료집성’] 감수/‘토헌집’역주저자박선식박사 글정리/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김제벽골제를중수하고기문을 쓴토 헌 박 초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토헌공묘소및재사(원모재)전경,전북완주군이서면은교신원길67-26. 토헌선생존영 벽제서원, 1971년 토헌공을 배향한 사우 모덕사 건립과 1979년 강당을 건립후벽제서원이라현액했다. 토헌선생유묵,해동명적보물5 26-1호. 토헌선생은 글씨에 뛰 어났다. 이 유묵은 봉화성독곡 (奉和成獨谷) 독곡성석린에받 들어화답하다.이다. 중수비, 이 비석은 1684년 박습 선생의후예상화(尙和)박초선 생의후예수대(秀大)공이함께 세웠다. 선생의학맥과사상 벽골제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