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page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울릉도 · 독도 119 가 울릉도 본섬과 함께 독도를 관 할할 것을 확실히 했다. 과거 일 본 정부의 공문서조차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였 다. 1696년 도쿠가와( 徳 川) 막부 의 ‘울릉도 도해금지(渡海禁止)’ 문 서, 19세기 말 메이지(明治) 정부 의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內探 書)’(1870년), ‘태정관(太政官) 지 령‘(1877년) 등이 그것이다. 특히 1877년 3월 일본 메이지 시대 최 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은 17세기 말 도쿠가와 막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 사실을 근거로 ‘울릉도 외 1 도(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이라고 분명히 지시하였다. 일본의 독도 침탈, 제2차 세계대 전 후 한국의 독도 영유 1904년 9월, 러일전쟁 초·중반 까지만 해도 일본은 독도 침탈을 주저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내무 성 이노우에(井上) 서기관은 독도 편입청원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 땅이라는 의혹이 있 는 쓸모없는 암초를 편입할 경우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외국 여러 나라들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 려고 한다는 의심을 크게 갖게 한 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1877년 메이지 정부가 견지하고 있었던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당시 일본 외 무성의 정무국장이며, 대(對)러시 아 선전포고 원문을 기초한 야마 자 엔지로(山座円次郞)는 독도 영 토편입을 적극 추진토록 했다. 그 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의 영토편입이 필요하다.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 고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 면 적함을 감시하는 데 극히 좋지 않겠는가?” 1905년 1월, 일본은 러일전쟁 의 침략전쟁 중에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로 독도를 자국의 영토 로 침탈하는 조치를 강행하였다. 이 침탈조치를 일본은 처음에는 독도가 주인이 없는 땅이라며 ‘무 주지 선점’이라고 했다가, 후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의사 재확인’하 는 조치라며 입장을 바꾸었다. 일 ➌ ➍ 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 칙령은『관보』 제1716호(1900.10.27)에 게재되었다.   ➍  안용복기념관에 전시된 도쿠가와막부의 ‘울릉도 도해금지’ 팻말(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