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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 것들 • 남한산성 119 천집』에 청에 잡혀간 포로가 50 만을 넘었다 하였고, 여자만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환향녀란 말은 이때 생겼다. 국제 정세를 헤아리 지 못하고 명의 천명이 지속되리 라는 헛된 믿음을 가진 조정의 안 일함 아니던가. 강한 쪽이 약한 쪽 을 흡수하는 침략사에서 전쟁은 대비하는 자만이 평화를 지킨다 는 것을 일깨워준다. 청 태종은 공덕비를 세우도 록 조선에 요구했다. 인조 17년 (1639)에 세운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며 치 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몸돌 앞면에는 청에 항복했던 상항과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 을 만주문자와 몽골문자로 새겼 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겨놓았 다. 삼전도비는 치욕의 역사라는 이유로 땅에 묻히기를 거듭한 끝 에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에 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 보호각 을 설치했다. 수치스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과 관련 해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 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주 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06 보(약 8km)라 하였다. 주장성은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쌓 은 성으로 남한산성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2007년 발굴조사 중 통일신라시대 최대 규모의 건물 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건축 연 대가 670∼880년으로 측정되어 주장성의 축성기록과 일치한다 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머물 렀다 는 행궁은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 있었으나 하궐(下闕) 154칸이 복 원되어 옛날의 정취를 맛보게 한 다. 이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 광지가 되었다. 주위에는 산이 겹겹이 싸여 아늑하였다. 내가 청량당 대청황제공덕비(사적 제101호, 비신 높이 395㎝ 너비140㎝, 잠실동 4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