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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의 俗姓(속성)은 李(이)씨. 본은 全州(전주)이시다. 法名(법명)은 龍夏(용하), 俗名(속명)은 學洙(학수), 耘虛(운허)는 그 法號(법호)이시다. 1892년 2월 25일 平安(평안)북도 定州(정주)군 新安(신안)면 安興(안흥)동에서 나셨으니 아버지의 諱(휘)는 鍾彬(종빈), 어머니는 白川趙氏(백천조씨)이시다. 韓日條規(한일조규)가 발표되자 漢文(한문)공부를 그만두고 平壤(평양)으로 나와 大成(대성)학교를 졸업, 이내 滿洲(만주)로 건너가 東昌(동창)학교 교사로 부임, 抗日(항일)의 앞장에서 獨立軍(독립군)신문 「新韓族(신한족)」을 발간하셨다. 한편 3.1운동에 호응하여 「光韓團(광한단)」을 조직 上海(상해)임시정부의 募金責(모금책)으로 서울에 잠입활동하시다가 日警(일경)에 쫓겨 淮陽(회양) 鳳逸寺(봉일사)에 피신 1921년 5월 1일 月初(월초)스님의 上座慶松(상좌경송)스님에 의해 金剛山(금강산) 楡岾寺(유점사)에서 出家(출가)하셨으니 釋譜(석보)로는 76世孫(세손)이시다. 이윽고 震應(진응).映湖(영호) 두 스님께서 四敎(사교)와 大敎(대교)를 마치셨고, 1926년에는 靑潭(청담)스님과 學人大會(학인대회)를 열어 宗風振作(종풍진작)을 크게 부르짖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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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다시 滿洲(만주)로 건너가 普成(보성)중학교 교사로 계시면서 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시다가 同志(동지)들이 검거되자 다시금 탈출 1932년 奉先寺(봉선사)로 돌아오셔서 講說(강설)에 전력하셨다. 8.15광복과 더불어 京畿敎務院長(경기교무원장)으로 추대되시자 곧 本寺(본사)의 淨財(정재)로 이 光東(광동)학교를 설립, 1946년 4월 9일 初代校長(초대교장)에 취임하셨다. 6.25동란에 절과 학교가 타버리자 海印寺(해인사) 등 몇몇절에서 10여 년 동안 後學(후학)양성과 經典(경전) 번역에 전심하셨다. 1959년 奉先寺(봉선사)와 우리 光東(광동)학교를 복구하시고, 1963년부터는 숙원이신 「한글대장경」 간행에 착수하여 東國譯經院長(동국역경원장)에 취임, 그 발간에 여력을 바치셨다. 譯著(역저)로는 「능엄경」을 비롯하여 「불교사전」 등 두루 白件(백건)을 헤아린다. 특히 「삼귀의」와 「사홍서원」은 바로 이 스님의 번역이시다. 1962년에 「문화훈장」을, 1963년에는 「독립운동공로포상」을 타셨고, 1978년에는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으셨다. 한편 奉先寺(봉선사) 어귀의 요람 우리 光東(광동)을 이곳 長峴(장현)으로 옮겨 新築(신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