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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런 우리 것들 118 2023년 3월 한인은 중국의 겨리 쟁기(두 마 리가 끄는 쟁기)를 비롯한 농기 구가 체격에 맞지 않자 직접 농 기구를 만들기도 하였다. 하천 의 물을 끌어들이는 무자위[水 車] 설치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 다. 수로를 개설하고, 수차를 설 치하면, 하류의 수량에 영향을 미치고, 중국인의 밭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분쟁의 소지가 있었 다. 중국 침략을 노리던 일제의 모략으로 일어난 완바오산 사건 (1931년 7월) 같은 한중 농민의 충돌도 있었다. 한인이 생산한 쌀은 동북 지역 의 경제와 식량을 해결해 줄 정 도여서 당시 중국 당국도 한인 을 적극적으로 유치했고, 벼농 사는 점점 확대됐다. 위만주국 을 세운 일제는 집단농장을 만 들어 조선에서 한인들을 강제 이 주시켜 논농사를 짓게 하여 위만 주국의 경제를 살리려고 하였다. 반면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와 북명(北溟) 조두 용(趙斗容, 1892~1964)은 동경 성 근처에 수로를 개설하고 발해 농장과 동만농사주식회사를 설 립하였다. 농장에서 논을 풀어 수 천 명의 한인이 농사로 안정된 생 활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고, 주민 자치는 물론 독립운동 기지 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동북 지역에서 논농 사는 한인의 상징이 되었고, 한 인은 벼농사 기술자로 이름났다. 1921년 용정에 있었던 동흥중학 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논농사 기술 을 정식 과목으로 가르쳤다. 한인 들은 수리조합을 만들고 농무계 (農務契)를 조직했는데 농무계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으로 확대되기 도 하였다. 발이 시려 논에 들어가 파 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벼농사의 시작 은 어려웠지만, 그 결과는 동북 지 역의 주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중 국 노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들어 와서 수갱자(水硬子, 조선 멥쌀)를 심었기에 맛있는 쌀을 주식으로 먹기 시작했다.”라고 말할 정도다.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고자, 독 립운동을 하고자 월강했던 한인이 동북 지역의 한인은 물론 중국인 까지도 식생활을 바꾼 식생활 문 화혁명을 일으켰다. 용정 동흥중학교 논메기 실습(1920년대, 규암독립사상연구소 제공)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 관 학예연구관과 과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교수, (사)규암독립사상연구소 부소장, 서울특별시 동산분과 문화재위원이다. 논저로 『코로나 시대, 다시 집을 생각하다』(2021,공저) ; 『대한독립! 그날을 위한 봉오 동전투』(2020) ; 『한국의 상례문화』(민속원, 2012) ; 「북간도 명동학교 막새기 와의 꽃문양에 나타난 민족의식」, 『독립운동사연구』 48(2014)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시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