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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➊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㉑ 117 흥 관아를 지키던 일본인의 방포 (放砲)에 분노한 농민들이 일제히 관아의 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군 수 박우양과 그 아들을 살해하고, 관아를 지키던 일본인 2명을 살 해하는 등 훨씬 더 격렬했다. 시흥농민항쟁은 각 면과 리의 집강이 주도하여 사발 통문으로 향회(민회) 를 개최하여 주민의 견을 수렴하는 형식 을 빌려 각각 수천 명 의 참여를 조직했다 는 점, 사전에 『독립신 문』, 『황성신문』 등 언 론을 통해 여론 조성 을 시도했다는 점, 1 차 시흥농민항쟁의 경 우 구속된 성우경과 김회상을 구출하기 위해 언론 활 용은 물론 만민공동회에 호소하 여 지원을 요청했다는 점, 2차 시 흥농민항쟁의 경우 반봉건에 더 해 일제의 침략에 맞선 항일 의식 이 강하게 표출된 사건이었다는 점 등에서 근대적 시민 의식의 성 장을 엿볼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 이었다. 시흥보통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서울시흥초등학교 교정에는 ‘시흥 3·1독립운동 발원지’ 표지 석이 있다. 1919년의 3·1운동에 ➌ ➌ 시흥 3.1운동 발원지 표지석(서울시흥초등학교 교정) ➍ ‘국혼은 살아있다’ 애국기념비(문일고 교정) ➍ ➊ ➊ 시흥관아 자리 표지판. 시흥농민항쟁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이하 현장사진은 필자 촬영). ➋ 2차 시흥농민항쟁 소식을 상세히 보도한 『제국신문』 기사(1904.9.17)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