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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5회) • 수원의 독립만세시위(5) -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3) 117 리는 꽤 멀었으며, 마을 자체도 언덕과 계곡의 지형 적 형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 었지만 세 마을 모두 거의 파괴되어 있었다.  (J. W.  Crofoot, 재한선교사 보고자료, 1919.10)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 있었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도 이곳에서 일제 당국의 잔인한 탄압이 일어났 다는 소식을 듣고 카메라를 들고 달려와 직접 실상을 조사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4월 11일 이른 아침 동틀 무렵에 마을 사람들은 불 타는 소리와 냄새로 인해 자다가 일어 나는 소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먼저 군인과  순사들이 불을 지르고 사람들에게 총을 쏘거나 때리 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놔둔 채 생 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달아났다. 어른과 아 이들 할 것 없이, 어머니들은 아기들을 들쳐업고, 아 버지는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서 모두 산으로 피 해 달아났다. 그러나 이미 그 과정에서 세 사람이 군 인들의 총에 맞아 숨졌고, 많은 사람들은 얻어맞았 으며 수명의 사람들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F.W.Schofield, The Murder at Wha-su-ri,  1919.4.11., 재한선교사 보고자료)  이 지역에 대한 광범위하고 잔인한 방화, 학살 만 행에 대해 영국 영사관에서도 현장 조사를 했다. 다 음은 그 보고서의 일부이다. [영국 영사관 무리가 불에 탄 제암과 수촌 마을들 을 방문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글] 우리는 이곳에서 수촌으로 갔고 수촌은 남쪽으로  4마일 떨어진 약 30채의 가구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이곳 또한 우리가 잿더미를 발견했다. (중략) 군인들 이 자정 바로 후에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서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불을 끄려고 하면  이들을 칼로 베었다. 난 4명의 매우 심하게 부상당한  남자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들었다. (중략) 우 리는 군인들에 의해 다른 15개의 마을들도 불에 탔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 선교사들 중 많은 수는 3·1운동을 목격하기 전까지 ‘일본은 문명국이고, 조선은 낙후되어 문명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만세시위에 대한 ‘문명국’ 일본 당국의 야만적인 행 동에 충격을 받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그들 눈앞에 서 전개된 일본인들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 했다. 그들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 맨손의 한국인들이 두려움 없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진정한 문명인의 모 습에 놀랐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