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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⑩ 117 동선의 통일과 조직을 회복시키 기 위하여’ 앞장선 인물로 1928 년의 ‘학생ㄱ당 사건’과 1932년 의 ‘경성적색노조건설협의회 사 건’으로 4년 간 옥살이를 했다. 일제강점기 이 학교 학생들은 일 제의 식민지노예교육에 맞서 맹 휴 등으로 맞섰고, 그 과정에서 1933년에는 퇴학 20명과 무기정 학 9명의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성동고 학생들은 민주화운동 에도 앞장섰다. 1964~65년의 굴 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 당시 성 동고 학생들은 「‘다또상’이 새나 라냐? 새나라가 ‘다또상’이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일찍이 1964년 3월 26일의 시위에 참여 하였다. 당시 터진 ‘새나라자동차 사건’을 풍자하여 일본산 소형차 인 ‘다또상’에 빗댄 구호였다. 한 일기본조약의 국회비준이 진행되 던 1965년에는 신득철, 탁경진, 구준회 등 3명의 학생이 구속되 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왕십리 일대의 3·1운동과 국채 보상운동 1919년 3월 9일 김인식, 권성 모 등 왕십리 주민 300여 명은 왕 십리공립보통 학교 교정(상 왕십리 763)에 서, 100여 명 은 학교 입구에 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시위대 는 광희문과 왕 십리를 오가던 전차 두 대에 투석하여 손상 을 입히기도 했 는데, 이날 일 제 헌병에 의해 27명이 체포되 었다. 왕십리 사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 고 서울 외곽에 서 동시다발 만 세시위가 벌어 진 3월 23일에도 100여 명의 주 민이 만세운동을 벌였고, 3월 26 일에는 약 150명의 주민이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왕십리 사람들은 일찍이 국채 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왕십리에 있는 사립 왕신학교(왕 십리보통학교의 전신) 학생 전성 욱, 김명제, 안자근춘(安者斤春), 우자근만(禹者斤萬) 등 133명이 27원 70전을 모아 『황성신문』에 기탁한 사실이 확인된다. 왕십리 보통학교는 1940년에 이전했고, 해방 직후에는 서울무학국민학교 로 이름도 바꿨다. 옛 왕십리보통학교 터 바로 앞 에 있는 왕십리교회는 1907년 연 동교회에서 분리되었는데, 3·1 1931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일제 당국에서 만든 조선기독교청년회학교 출신 강병도의 수형자 카드(국사편찬 위원회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6 · 10만세운동 주도자들에 대한 재판소식을 전하는 『동아일 보』 보도 기사(1926.11.4). 오른쪽 붉은 테두리 안이 박두종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