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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 것들 • 북간도 명동촌 117 (明東村)의 옛 이름이다.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처음으로 마주하는 마을이다. 오늘날 용정시(龍井市) 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화룡현(和龍縣) 지신향 (智新鄕) 장재촌(長財村)이다. 명동촌은 김약연 선생 등이 사 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건설한 이상촌으로, 북간도 독립운동의 기지였다. 주민 전체가 기독교를 신앙하는 신앙공동체와 같은 마 을이기도 하였다. 해동도 되지 않 은 2월에 이들이 서둘러 부걸라 재로 이동한 것은 그해 봄부터 농 사를 지으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 문이다. 부걸라재는 중국인 지주 동한 (董閑)이 소유하였던 땅 600만여 평을 네 가문이 돈을 모아 사들여 개간한 곳이다. 이듬해 두만강 강 가에 있었던 윤동주 시인의 집 윤 재옥(尹在玉, 1844~1906) 선생의 집안 식구가 합류하면서 다섯 가 문이 되었다. 이 다섯 가문이 힘을 합쳐 이상향 마을을 개척하고, 동 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명동촌’이 라 이름하였다. 이곳이 윤동주(1917-1945), 문 익환(1918~1994), 송몽규(宋夢 奎, 1917~1945)가 태어난 곳이기 도 하다. 영 화배우이자 감독으로 유 명한 나운 규(羅雲奎, 1902~1937) 가 그 이름 도 유명했던 명동학교 졸 업생이라는 것도 명동촌의 유명세를 더해준다. 명동촌 개척자들의 일상 생활 문화는 사진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번에는 문익환 목사의 모친인 김신묵(金信黙, 1895~1990) 여사 의 회고로 그 실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신묵 여사는 함경북도 회 령군 용흥면 용성리에서 감하규 와 김윤하 부부의 3남 6녀 중 넷 째로, 1895년 4월 5일에 태어나 5 살 때 부걸라재로 왔다. 16살 때 문재린(文在麟, 1896~1985)과 혼 인하였고, 1931년까지 명동촌에 살다가 룽징으로 이사하여 해방 때까지 살다가 해방 후 남한으로 왔다. 천한 이름이 오래 산다? 김신묵 여사의 어릴 때 이름이 자 원래 이름은 ‘고만녜’였다. “이 제 딸을 그만 낳으라”는 의미였다 고 한다. 자매들 이름은 노랑네, 귀복례, 곱단이, 어린아, 데진녜 (내던진 아이) 등이었다. 송몽규의 모친은 개똥녜, 최기학의 부인은 농빼(농방에서 출생?) 등으로 불 렀다. 당시에는 아이에게 천한 이 1973년 문재린 목사가 명예 박사학위를 받을 당시 문목사와 김신묵 여 사(노컷뉴스 제공)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회고록과 녹취 록을 함께 정리한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문영금·문영미 엮음, 삼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