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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 것들 • 북간도 명동촌 막새기와 117 운영할 수 없었다. 재정난과 함께 1907년 일제가 북간도 한인을 보 호한다는 빌미로 세운 간도 임시 파출소의 압박으로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간도의 항일 민족교 육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았 다. 북간도에는 1899년 집단으 로 이주하여 개척한 명동촌이 있 었다. 선구자 규암(圭巖) 김약연 (金躍淵, 1868~1942) 선생은 장 재촌(長財村)에 규암재(圭巖齋) 를, 소재(素齋) 김하규(金河奎) 선 생은 대룡동(大龍洞)에 소암재를, 남위언(南韋彦) 선생은 중영촌에 오룡재라는 3개의 서당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북간도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 명동학교 특히 규암 김약연 선생은 용정 에 서전서숙을 설립할 때 적극적 으로 후원하였고, 감학연, 남위 언, 최기학 등 문하생을 직접 보 내 신학문을 배울 수 있게 하였 다. 그런데, 기대했던 서전서숙이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자 규암 선생은 세 서당을 합하여 명 동서숙(明東書塾)을 세우고, 신학 문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어 1908년에는 명동학교(明 東學校)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 인 신학문 교육과 우수 교사 확 보에 나섰다. 커리큘럼에는 항일 민족의식은 물론 무장 독립 투 쟁을 위한 군사훈련 과목도 있 었다. 항일 민족교육은 와룡동의 창동서숙(昌東書塾), 소영자의 광 성서숙(光成書塾), 자동의 정동서 숙(正東書塾) 등으로 확산되어 북 간도 항일 민족운동의 토대가 되 었다. 이러한 항일 민족교육은 학교 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표 적인 것이 명동촌 주택의 지붕에 있는 막새기와이다. 막새기와는 기와로 이은 지붕의 끝을 마무리 하는 기와로 여기에 문양을 넣어 <제1유형> 연주문 삼태극형(1) <제1유형> 연주문 삼태극형(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