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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서울지역 학부모와 함께 서울 곳곳을 탐방 하고 있다. 이번에는 금천구 일대 의 근현대 역사 현장을 둘러본 이 야기를 소개한다. 금천구 일대는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시흥이 었다.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되었 다. 금천구는 1995년 3월, 구로 구로부터 분구되면서 비로소 탄 생하였다.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가장 늦게 자치구가 되었지만, 역 사와 전통으로 말하자면 둘째가 라면 서러워할 지역이다. 탐방은 시흥농민항쟁의 현장인 시흥관아 터에서 시작하여 서울시흥초등학 교, 금천구청 일대를 거쳐 금천순 이의집(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 관)에서 마무리되었다.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㉑ 금천구의 근현대 역사 현장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금천구 분리 구로공단 역사 · 노동자들 생존권 투쟁의 현장 독특한 모양의 ‘금천 평화의 소녀상’ 두차례 시흥농민항쟁의 현장 1919년 3월 7일 시흥보통학교 첫 시위 구로동맹파업의 현장 등 다수 있어 116 2025년 5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① 글 김학규(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금천구, 시흥농민항쟁의 중심지 시흥농민항쟁은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불의에 항거하여 시흥군민이 일으킨 봉 기였다. 1898년의 1차 봉기는 전 임 군수 문봉오의 가렴주구와 이 속(吏屬)의 비리에 맞서 일어났 다. 1904년의 2차 봉기는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병참기지 와 철도 건설을 위한 역부(役夫, 일꾼) 모집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 했다. 전쟁터로 가는 역부라는 인 식 때문에 자발적 모집이 어려워 지자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압 력을 가해 지역별로 인원을 할당 케 했다. 시흥군수는 그마저도 여 의치 않자 일본인 모집책과 함께 지역을 순회하면서까지 강제 모 집에 나섰지만, 그 부당성을 지적 하는 군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던 것이다. 두 차례의 항쟁은 모두 남면 집 강(執綱) 성우경(1842~1916)을 중심으로 시흥군 6개면 42개 동 리의 수천 명이 읍내 한천교 아래 에서 향회를 개최하는 형식으로 집결하여 시작되었다. 1차 봉기 때는 군수가 없는 관아로 직격하 지 않고, 군수 밑에서 일하면서 가 렴주구에 앞장선 이속 9명의 집 을 습격하여 불태우는 방식으로 벌어졌다. 반면, 2차 봉기 때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