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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⑮ 115 로 본격화되었다. 압구정에 현대 아파트가 들어선 것도 이 즈음인 1975년부터였다. 이후 강남에 관 공서와 학교 등이 대거 이전해오 면서 이곳은 수도 서울의 중심부 로 자리 잡았다. 도산공원과 도산안창호기념관 1973년 조성된 도산공원은 도 산 안창호의 묘와 도산안창호기 념관이 있는 곳이다. 안창호(1878~1938)는 일찍이 공화정을 목표로 한 최초의 독립 운동 조직인 신민회를 이끌었고, 1919년 3 · 1운동 직후에는 탁월한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대한 민국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인물이 다. 안창호가 상하이(上海)에서 일 제에 체포된 것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虹口)공원 의거 직 후였다. 국내로 압송되어 옥살이 를 하고 나온 안창호는 수양동우 회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체포되어 옥살이를 더 하다 병보석으로 석 방되었지만, 1938년 끝내 서거하 고 말았다. 이때 안창호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안창호의 비서로 일했고 경성의학전문부속 병원 외과 의사로 있었던 태허 유 상규(1897~1936)의 묘 옆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안창호가 남긴 “나 죽거든 시체를 고향에 가져가 지 말고, 유상규 군이 누워있는 그 곳 공동묘지에다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받든 까닭이다. 강남 개발 과정에서 도산공원 이 현 위치에 조성되면서 안창호 의 묘만 이곳으로 이장한 것은 안창호의 유언을 외면한 처사였 다. 현재 도산공원의 안창호 묘는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혜련 (1884~1969)의 유해도 함께 모 신 안창호 · 이혜련의 합장묘로 있 다. 이혜련은 3 · 1운동 직후 안창 호가 중국으로 가자 미국에서 대 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하여 대한인 국민회와 더불어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 등 독립운동을 지속한 인물이다. 청담근린공원 근처의 이재인 집 터와 이정수 집터 이재인(1900~1964)은 1920년 만주(중국 동북지방)에서 파견 나 온 김기한(1883~?)을 통해 만주 의 대한독립단(도총재 박장호)에 가입하여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김기한 등과 비밀결사 ‘대한독립 중앙본부’를 조직하여 ‘조선독립 취지서’, ‘조선독립군 환영단 제안 문’ 등을 제작 배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1920년 8 ➊ ➋ ➌ ➍ ➊ 도산안창호기념관 ➋ 도산안창호기념관의 내부 전시관 ➌ 안창호선생 이혜련여사 합장묘(도산공원)) ➍ 안창호선생 이혜련여사 묘 앞에 세워져 있는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