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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⑭ 115 국채보상 의연금으로 13원 55전 을 모아 대한매일신보에 기탁하 였다. 고덕리 사람들의 국채보상 운동 참여 현황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5일자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선 1896년에는 고 덕리 사람 어윤석(1846~1898), 어경선(1869~1916), 어취선 (1870~1936) 등이 유인석이 이 끈 제천의병에 참여하기도 했다. 상일리 만세운동의 현장, ‘3·1 독립운동 기념터’ 상일리만세광장에 미쳐 도달하 기 전 큰길가에 강동구에서 ‘3·1 독립운동 기념터’ 표석을 찾아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경 기도 광주군 구천면 사람들이 이 틀(3월 26일과 27일)에 걸쳐 벌인 상일리 만세운동을 기리는 표석 이다. 이곳은 1919년 당시 일제 의 상일리헌병주재소(상일동 259 일대)가 있던 곳이다. 상일리에서는 1919년 3월 26 일 약 300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 는데, 헌병의 탄압을 받게 되자 다 음날인 27일에는 인근 서부면 사 람들까지 포함하여 약 1천 명의 시위대가 상일리헌병주재소를 에 워싼 채 태극기를 들고 돌을 던지 면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일 제의 헌병은 발포까지 했고, 이 과 정에서 안종현(1864~1919, 서부 면 감북리), 최천성(1897~1919, 서부면 감이리) 등 2명이 사망하 고 김경배(1887~1948, 구천면 상일리)를 비롯한 10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날 서 부면 감일리 주민 40여 명을 이 끌고 대열에 합류해 상일리헌 병 주재소 앞 시위를 주도한 구희서 (1872~1961)는 징역 7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3월 27일은 상일리 만이 아니 라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서 광범 위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인데, 구천면 길리(현 강동구 길동)에서 도 같은 날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상일리 만세광장 상일초등학교 동편 고덕천 변 (상일동 511)에는 2022년에 상일 리 만세운동을 기리고자 ‘상일리 만세광장’을 조성해 놓았다. 상일 리 만세광장에는 상징 조형물과 함께 조성 취지문도 세워져 있는 데, 상일리 만세운동의 진행 경과 도 담아 놓고 있다. 강동구 주민들 이 산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 ➊ ➊ 굴레와 희망(상일리만세광장 상징조형물, 이하 현장 사진은 김학규 촬영) ➋ 상일리 ‘3·1독립운동기념터’ 표석 ➌ 일제의 보고자료에 보이는 상일리 3.1운동상황(「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9보),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➋ 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