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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5회) • 수원의 독립만세시위(5) -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3) 115 쌍봉산에 집결, 2차 시위, 우정 면 사무소 3차 시위, 화수리 주재 소로 진격 4차 시위 및 주재소 방 화 소각, 무단 발포 순사 처단 등 으로 이어졌다. 시위는 이른 아침 부터 오후 7시 30분,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까지 이어졌다. 그 후 에도 각자 집에 돌아가 저녁 식사 를 한 후 사랑리의 돌이 많은 남산에 모여 일본군 진 압부대외 맞서 싸우기로 하였다. 20km가 넘는 거리 를 이동해 가며 면 내의 일제 면사무소, 주재소 등 관 공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주재소를 불태워 없앤 주민들은 군번 없는 독립군 부대였으며, 장안 우정면 만세시위는 단순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아니라, 내 고장 해방을 위한 독립전쟁이었다. 일제의 ‘야만적’ 탄압 경성(京城)의 조선군 참모부에 다음과 같은 긴급 보 고가 들어왔다. “4월 3일 오후 수원군 화수 순사주재소는 약 1,000 명의 폭민에게 포위되어 투석 등의 폭행을 당하였다.  어쩔수 없이 발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참살당하였다. 순사보(조선 인) 3명 중 2명은 생사 불명, 1명은 도망하여 발안 주 재소에 급보하였다.” 특별검거반이 출동했다. 특별검거반의 활동에 관 한 보고가 올라왔다. 하세베[長谷部] 대위는 4월 4일 오후 6시에 발안 장 에 도착해 철저하게 발안장 지역을 경계하는 한편,  화수 방면의 정황을 수색했다. 다음날 4월 5일에 한  부대를 보내 삼계리에 피난했던 일본인 부인, 아이  43명을 발안장에 수용한 후, 발안장 엄호의 목적으로  헌병경찰관 9명 및 보병 5명을 인솔하여, 4월 6일 오 전 1시 30분에 출발해 발안장의 서쪽 2리에 있는 수 촌리(주모자 소재지)를 포위 검거하려 하는데, 어두 운 밤에 폭민의 저항으로 인해 격투로 기총(騎銃) 1,  순사용 칼 1이 파손되었으나 6명을 검거한 후 수원을  거쳐 귀경했다. 장안 우정면 지역 수색과 주도자 검거는 쉽지 않았 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 하는 집이 많아 낮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나 산으로 나갔다가 밤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검거 반은 작전을 바꾸어 대대적인 야간수색을 감행했다. 다음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보도된 이 지방 탄압 기사이다. “이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반농반어로 낮에는 농 사나 고기를 잡고 혹은 산중에 숨었다가 밤이면 모른 장안면-우정면 사이에 있는 쌍봉산 만세시 위지 전경(뒷쪽 가운데,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 때 불에 탄 것을 복원한 수촌교회 의 모습(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