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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⑪ 115 독립운동가 노선경의 옛집 중계그린아파트(123동 701 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 대 군 무 부 장 을 지 낸 노 백 린 (1875~1926)의 장남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노선경(1895~1993) 이 서거한 곳이지만, 지금은 그 흔 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노선경은 숭실학교를 졸업한 이후인 1917년 평양사람 장일환 (1886~1918)이 주도한 ‘조선국 민회’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이 듬해인 1918년 2월 평양경찰서 에 장일환 등 11명과 함께 체포되 어 옥살이도 했다. 그후 만주로 망 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에 가입 하여 활동하는 한편, 유하현 대석 탄학교에서 군사강습소를 운영하 기도 했다. 1920년에는 학생모집 과 군자금조달 등을 위해 국내로 들어오던 중 신의주 건너편의 중 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또다 시 옥살이를 하는 등 대를 이어 독 립운동에 헌신했다. 노선경의 동생 노태준(1911~ 1970)은 한국광복군 간부로 활동 했고, 여동생 노순경(1902~1979) 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살이 를 했다. 3·1운동에 참여한 한개문과 암살단의 유득신 노해면 하계리 출신의 도로인 부 한개문(1895~?, 당시 경성 거 주)은 1919년 3월 23일 밤 9시 경 종로3가에서 시위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3월 23일은 시내는 물론 서울 외곽에서 동시다발 만 세운동이 일어난 날이었다. 경성 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 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자 항 소한 한개문은 경성복심법원에 서 태(笞) 90도(度)의 처분을 선 고받았다. 김상옥 의사(1889~1923)와 함께 암살단에서 활동한 유득신 (1896~1958)은 양주군 노해면 월계리(번지미상)에서 출생했고, 월계리에 있던 사립 창흥학교를 졸업한 인물이다. 유득신은 1920 년 10월 암살단을 이끌던 김상옥 을 왕십리교회(현 꽃재교회) 목사 김태현의 집에서 만나 암살단에 가입하였다. 김상옥이 상하이로 탈출하기 위한 여비 마련 요청을 받자 권총 1정과 탄환, 폭탄을 받 ➊ ➊  상계동 철거 현장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고 있는 상계동 주민들(1987.4.14. 경향신문)  ➋  반대운동 현장에 세워진 ‘소각장반대주민결의기념비’(1994.4.14 경향신문)  ➌  ‘소각장반대주민결의기념비’가 세워져 있던 108동 입구에서 바라본 쓰레기소각장 굴뚝 ➋ 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