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page
114page
상소투쟁과 유배생활
시폐 건의와 제주도 유배
1873년고종 10, 고종은 최익현이 시폐 4조에서 지적한 사대문세四大門稅를 폐지하고 그를 동부승지로 임명했다. 그러나 최익현은 사직 상소 '사동부승지소辭同副承旨疏'를 올려 집권층의 부패를 비판했다. 이 상소로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이 되었으나, 다시 사직하며 두 번째 계유상소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만동묘와 서원 철폐, 국적國賊 신원, 호전胡錢, 청나라 돈 사용, 토목 공사와 원납전 발행 등 흥선대원군의 시폐를 바로잡을 것을 주장했다.
두 번째 계유상소로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나, 대신들이 부자간을 이간한다고 비난해 최익현은 12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년 3개월 뒤 풀려났다. 고종은 최익현의 건의에 따라 가혹한 조세와 부과금 탕감 등의 조처를 하였다.
도끼상소와 흑산도 유배
1876년고종 13 1월 22일에 강화도에서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반대하며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關斥和議疏'를 올렸다. 이는 선조대의 문신이며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確'를 본받은 것이다. 도끼를 지니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린다는 뜻으로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다. 조헌은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 사신의 처형과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최익현은 이를 본받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으로 나아가 서양 오랑캐가 왜적을 끼고 조약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5가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23일 의금부 옥사에 갇혔다가 25일 흑산도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 1879년 2월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