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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2025년 5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4회) 영은 이처럼 일제의 박해 속에 청춘을 보냈다, 이 시 기 시인 김억 등으로부터 신문사에 들어가라는 권유 를 받았다. 하지만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해야 했던 까닭에 직장을 가질 수 없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다. 독립운동의 중요 한 근거지와 무대를 빼앗겼다. 그는 좀 더 긴 안목으 로 민족의 정신적·물질적 역량을 배양하기로 작정했 다. 그 시기 호형호제하던 조선일보 교정부장 김찬룡 이 1년 이상 계속 유봉영에게 입사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이 어렵게 된 마당에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신문사였다(「조선일보 사람들」). 1936년 조선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폐 간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조선 일보가 복간되자 재입사하여 1971년 퇴사할 때까지 교정부장·문화부장·편집부장·편집국장 · 주필 · 부사장 등을 지냈다. 유봉영은 1966년 ‘만주 땅도 우리 영토’라는 기치 를 내걸고 백산학회(白山學會)를 창립하여 『백산학 보』를 32집까지 발간하며 정성을 기울였다. 학교법 인 숙명학원 이사장과 제8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전국구), 1972년 5월~1982년 2월까 지 민 족문화추진회 최장수 이사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 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광복 후의 기증과 두 청년의 삶이 주는 의미 유봉영은 정석해가 보낸 선언서를 봉투 와 함께 간직했었다. 광복 후 이 선언서를 1956년 개관한 한국연구도서관에 기증했 다. 후에 정석해가 보냈음을 알게 된 한국 연구도서관 측에서 정석해와 유봉영을 한 자리에 초 청하여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광경을 사진으로 남 겼다. 그 후 이 등사판 독립선언서는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철산에 보내진 독립선언서 이야기는 3 · 1운동이 전 국으로 확산되는 거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그 때 정석해와 유봉영 같은 열정과 용기있는 청년들이 3 · 1운동을 서울과 지방에서 일으키며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해방된 조국 에서 정석해는 철학자의 길을, 유봉영은 언론인의 길 을 걸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선구자 역 할을 했다. (계속)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정석해 유봉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