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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2025년 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1회) “이런 죽일 놈들!” 3월 30일 날이 밝자 분노한 동창포 500여 명이 모 였다. “주재소로 갑시다!” “저런 놈들 혼쭐을 내주고, 붙잡힌 사람들 구해 냅 시다!” 이때 교회 장로인 한 선생이 나서서 말렸다. “자자, 진정들 하고, 대표 두 사람만 들어가 항의하 고, 나머지는 주재소 밖에서 기다립시다.” 대표 2명이 주재소에 들어가 여성들에 가한 모욕 과 가혹행위에 항의하며 요구했다. “모든 구금자를 당장 다 석방하시오!” 바깥을 에워싼 군중들의 위세에 압도된 경찰은 4 명만 남기고 나머지를 풀어주었다. 한 여성은 하루 사이에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 지 양쪽에서 부축하고 나와야 했다. 그 광경을 본 시위대는 분개했다. “주재소 안으로 쳐들어갑시다!” “주임 저놈을 두들겨 패 버립시다!” 그러나 장로들이 나서 군중을 진정시켰다. “다들 진정하시고, 일단 집 으로들 돌아갑시다.” 이틀 뒤 인근 광산 600여 광부가 한 장 로를 찾아왔다. “우 리들이 경찰을 습격 하여 복수하려 합니 다.” 한 장로는 주재소 에 갇힌 교인들이 다 칠까 봐 걱정되었다. “갇힌 사람들이 석방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송될 때 까지만 기다려 주시게.” 가까스로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동창리 시위대의 절제와 자제, 일제 경찰의 만행 은 1919년 6월 1일 황해도 재령선교지부의 샤프 [C.E.Sharp, 사우업(史佑業), 1910. 10. 18 한국 선교 지 도착] 선교사가 미국의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A. J. Brown에게 보낸 4월~6월 분기 보고 서신에 고 스란히 담겨 전달되고, 이것은 미국 의회의 상원(上 院)에까지 보고되었다. 동창(Tong Chang)에서의 시위 (샤프 박사의 설명) 동창 마을은 약 300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곳이다.  (중략)  체포된 이들 중 미망인 정정렬(Chung Chung Yul) 이 있다. 경찰들은 그녀의 겉옷을 모두 찢고 완강히  저항하는 그녀를 매질하며 속옷까지 찢어내고 한 동 안 매질을 계속하던 그들은 차와 떡을 먹으면서 나체 미국 상원의회 의사록에 기재된 「한국사정 보고서 17(1919.11.15)」 중의 동창리 시위보고 내용(상해  『독립신문』 기사) 동창리 만세 시위에 관한 왜곡된 보고서를 올 린 황해도 장관 신응희. 그는 3·1운동 당시 도 민들을 회유·협박하는 포고를 발표하여 빈축 을 샀다. 그는 친일파 고위 관료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