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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2024년 12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홍은 해방될 때까지 5차례에 걸 쳐 10년간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 면서도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항시 인 이육사의 친척이기도 한 이병 희(1918~1912)가 남긴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증언한 영상물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날 수 있다. 이관술(1902~1950)과 신명균 (1889~1940)은 독립운동의 역 사에 이름을 남긴 동덕여고보 교 사 출신이다. 1929년부터 역사와 지리를 담당했던 이관술은 박진 홍 등이 주도한 1931년의 동맹휴 학 투쟁을 지도했고, 학생들과 함 께 비밀독서회 활동을 하면서 본 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 다. 전설적인 사회주의계 독립운 동가 이재유(1905~1944)와 함께 경성재건그룹을 이끌었던 이관술 은 1936년 12월 이재유가 창동리 에서 체포될 때도 검거를 피했다. 땜쟁이, 행상 등으로 가장해 전국 을 돌며 피신에 성공한 이관술은 이후 서울로 돌아와 경성콤그룹 결성을 주도하던 중 1941년 초에 체포되지만, 1943년 폐병에 걸 려 병보석으로 일시 석방되자 기 본적인 치료를 마친 후 잠적하여 대전을 근거지로 비밀활동을 계 속하다 해방을 맞았다. 대종교 간 부이기도 했던 신명균은 국어교 사였다. 그는 1921년 조선어연구 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조선어연 구회가 조선어학회로 전환된 이 후인 1932년부터는 간사장을 맡 기도 했다. 신명균은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전 시총동원체제를 확립하고 창 씨개 명 등 본격적인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가자 이에 분개하여 1940 년 11월 자결하였다. 이관술은 해 방 후 신명균에 대해 “그는 일생 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 마쳤거 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 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였다”고 회 고했다. 동덕여고 교정 안에 이러한 학 생과 교사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역사관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 쉬운 일이다. 해방 후 방배동에 정착한 한국광 복군의 김용주·김중호·박기성· 피문성 방배동에는 해방과 함께 귀국 하여 이곳에 정착한 한국광복군 ➍  동덕여고보 교사 이관술의 체포소식을 전하고 있는 『매일신보』 기사(1933.1.30)  ➎  동덕여고보 졸업 앨범에 실린 이관술, 이순금, 이효정(왼쪽부터) ➎ 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