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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2024년 6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03회) 구 순회전도자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백낙열은 고 주리 김성열, 제암리 안종후와 함께 경성으로 달려가 경성의 독립만세 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돌아왔다. 백 낙열은 남양교구 각 전교실을 돌며 연락을 취하는 한 편, 고주리의 김홍열에게 고주리 전교실에서 2명을 선정하여 수원으로 보내 천도교 중앙의 지시를 받아 오게 했다. 3월 15일 김홍렬은 전교사 안종환과 안종 린을 수원에 파견했다. 수원에서 이병헌을 통해 지방 교구 자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받았 다. 백낙열은 장안면과 우정면을, 김홍열은 향남면과 팔탄면을 책임지고 추진하기로 했다. 산상 봉화시위 4월 1일 밤 7시경 백낙열이 사는 장안면 수촌리 개 죽산의 봉화를 시작으로 석포리 무봉산, 어은리 남 산, 우정면 이화리 보금산, 조암리 쌍봉산, 장자터 봉 화산, 운평리 성신재, 매향리 망원대, 팔탄면 천덕산, 향남면 가재리 당재봉 등 원근 봉우리에서 일제히 봉 화가 피어올랐다. 1976년 당시 94세였던 고주리 현 병기(玄炳起) 옹이 당시를 회상했다. “높은 산들이 불길로 꽃밭을 이룰 때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에 산이 흔들리는 것 같았고,  그 절규는 함정에 빠진 맹수가 구원을 요청하는 처절 한 울부짖음 같았다.”  만세시위 주도자의 한 사람인 차병혁도 사법경찰 신문에 답변하는 중에 아래와 같이 말했다. “4월 1일 혹은 4월 2일 밤 자기 마을에서 산에  불 을 올리고 다수의 사람이 만세를 불렀다. 그 날 밤에 는 수촌리 뿐만 아니라 장안면내 석포리, 어은리, 우 정면내 주곡리, 멱우리 등의 산에서도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장안면 수촌리 김교철은 부근 일대 거의 모든 산봉 우리에서 봉화시위를 했음을 증언했다. “1919년 4월 2일 밤 교회당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 아올 때 부근의 14개소 산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날 밤 충청도의 여러 산에서 봉화 를 올리기 시작하여 점차 우리 마을 쪽으로 왔다.” 김교철의 말대로 산상 봉화시위는 경기 남부와 충 청남북도 일대에서 특히 광범하게 일어났다. 산상 봉 화시위는 만세시위를 시간적으로 낮에서 밤으로, 공 간적으로는 평지에서 산상으로 연장한 독창적인 만 세시위였다. 장안 우정면에서 봉화시위가 심상치 않 게 퍼져 나가자 4월 2일 경기도지사 마츠나가 다케 키치(松永武吉)는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장안면 장의 진술을 보고했다. 1) 4월 4일 수원군 장안면장 김현묵(金賢默)이 수원군 청에 출두하여 군수, 주임 입회하에 진술했다. 4월 2 1) 일본 내각은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호칭하고 시마네 현 소속 오키의 도사(島司)가 관할한다.”라고 결정했다. 이어 2월 22일 ‘시마네 현 고 시 제40호’로 이를 고시했다. 그런데 경기도지사 마츠나가 다케키치(松永武吉)는 1904년 11월부터 1908년 3월까지 일본 시마네현 지사를 지내면서 독도 침탈에 직 접 관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