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page

3월의 전설(114회) • 평북 철산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1) 113 의 토지를 처분하여 마련한 5,000원으로 평판인쇄기 를 구입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간하 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상해, 심양(瀋陽), 신의 주, 철산, 서울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체 포와 석방이 되풀이되었다. 1920년 봉천에서의 만남 1920년 5월 말, 정석해는 상해로 가기 위해 만주 의 봉천(奉天, 현재 심양)으로 갔다가 뜻밖에 유봉영 을 만났다. 둘은 한 장의 독립선언서로 말미암아 똑 같이 압록강을 건넜고, 똑같이 독립운동의 길에서 동 지의 입장이었다. 유봉영은 정석해에게 말했다.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나한테 독립선언서를 보냈 더라.” 정석해는 일제의 추적을 의식하여 자기가 보냈다 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작별했다. 학자의 길을 간 정석해 봉천에서 유봉영과 헤어진 후 정석해는 상해로 갔 다.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 도산은 독립 이후의 조국 을 위해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독일로 가서 뷔 르츠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 그후 프랑스의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60년 4 · 19 직후 프랑스 대사로 거론되었을 때 그는 손사래 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유학 시절의 나는 거지나 다름없었소. 대 사란 그 나라의 얼굴인데 거지가 대사로 왔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하겠소?” 힘든 시절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파리가 독 일 의 나치에 점령되자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감시대상 인물이 되어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해방이 되자 연희전문학교에서 그를 철학과 교수로 초빙했다. 1960년 4.19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대학교수 시위를 이끌 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그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 교수단에 참여했다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정 치교수 1호’가 되었다. 그는 학자였지만, 학문연구에 그치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삶을 살았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96년 8월 14일 향년 97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병사했다. 언론인의 길을 간 유봉영 유봉영은 1922년 2월에는 경의선 기차 안에서 경 찰에 붙잡혀 신의주경찰서에 며칠 동안 구금되었 다가 풀려났다. 공부를 계속하고자 일본으로 가서 1924년 동경(東京) 보급영어학원을 수료하였다. 그 해 8월 19일에도 경성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8 월 26일 1주일 만에 풀려났다. 1926년 2월 9일 봉천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구 금당했다가 2월 19일에 출감했다. 또 1927년 5월 11 일 경의선 기차 안에서 경찰에 피검되어 신의주서에 구금당했다가 5월 20일에 출감한다. 1929년 5월 6 일에는 철산경찰서에 붙들려 가서 5월 16일 신의주 형무소로 이송된 후 5월 25일 불기소 석방된다. 유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