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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➊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⑲ 113 ~1941)는 1921년 9월 12일 남 산 조선총독부 건물 2층에 두 발 의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의 심 장부를 서늘케 한 인물이다. 김 익상은 중국에서 몰래 입국하 여 이태원에 사는 동생 김준상 (1897~1925)의 집에 거점을 마 련하였다. 그는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여 총독부 건물로 들어가 는 데 성공하였고,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비서과와 회계과에 각각 하나씩 폭탄을 던졌다. 애석하게 도 비서과에 던진 폭탄이 폭발하 지 않았지만, 회계과에 던진 폭탄 이 굉음을 내고 터지면서 조선총 독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총독부 건물을 유유히 빠져나간 김익상은 이태원의 은거지에 들 른 후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 하였다. 김익상은 이듬해인 1922 년 2월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다 나카[田中義一] 일본 육군대장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후 체포된다. 김익상은 무기형을 선고받고 일 본 나가사키형무소[長岐刑務所]에 서 옥살이를 하다가 몇 차례 감형 을 받은 끝에 1936년 8월 2일에 출옥한다. 김익상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이 태원 김준상의 집은 비극의 장소 가 되고 만다. 김익상의 망명 후 집안을 책임지고 있던 동생 김준 상이 말을 빌려 운수 일을 하다 말 이 죽는 바람에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고, 그 여파로 1925년 집에 서 목을 매 자결한 것이다. 현재 김익상이 은거했던 이태 원 김준상의 집 자리에는 이태원 어린이공원이 들어서 있다. 하지 만 공원에는 이곳이 김익상 의사 의 은거지였다는 사실을 알 리는 표지판 하나 없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이태원 공동묘지와 유관순 열사 추모비(부군당 역사공원) 유관순 열사 추모비는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 안에 있다. 이태 원과 한남동 일대는 조선후기부 터 일제강점기까지 이태원 공동 묘지가 있었는데, 1920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유관순 열 사(1902~1920)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이곳을 군용기지와 주택지로 재 개발하면서 공동묘지는 1937년 에 사라지고 만다. 이때 유관순의 분묘를 비롯한 무연분묘 28,338 기가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져 화장한 후 합장 처리되었다. ➐ 유재흥 등 일본육사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과 졸업 장교를 소개하고 있는 경성일보 기사(1940.3.2) ➑ 김익상 의사 은거지 터에는 현재 이태원어린이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➐ 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