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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1회) • 황해도 안악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2) 113 용문면 안악군 용문면 동창리는 동쪽의 문산면, 북 쪽의 안곡면이 만나는 교통요지이다. 3월 초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이곳에 전달되어 왔 다. 동창포 예수교회 장로이자 사재로 설립한 명신학원(明信學園, 여학교) 운영자 임성근(林 成根)(『동아일보』 1930. 11. 16)과 같은 동리 김상건(金尙乾), 표창현(表昌鉉), 안곡면 금정 리의 신태홍(申泰鴻)이 모였다.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하네! 독립의 기회가 왔소!” “우리도 독립만세 운동을 하세!” 3월 9일 이들은 태극기 180개를 제작하였 다. 청년들의 이런 움직임에 교회 임원들이 제 지하고 나섰다. “아야, 그러질 말아! 저기 철광산 노동자들이 알고 참여하면 말이야, 폭동이 일어날 거야. 폭동!” 어른들의 반대로 만세운동은 보류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용문면 옆 은홍면과 안악면에서 만 세시위가 일어났다. 동창헌병주재소에서는 즉시 광 산 노동자들의 집회를 금지했다. 학교도 방학에 들어 갔다. “이러다간 만세시위를 못하게 될 수 있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네!” “3월 29일이 동창리 장날이네!” “이번 장날에 합 세!” 3월 29일 장날이 되자 임성근 등 청년들은 준비해 둔 태극기를 들고 동창리 시장으로 나아갔다. 12시 30분 동창포예수교회 부속 사립배영학교 학생과 신 도 약 160명이 중심에 섰다. 그들은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명신학원 재학생 및 졸업생들도 달려왔다. 만세소리 에 장꾼과 주민들이 모여들어 군중은 금새 4~500명 으로 늘어났다. 동창포 인근을 행군하던 일본 보병들이 급보를 듣 고 달려왔다. 이들과 동창리 주재소 헌병들이 함께 시 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모자 24명을 체포했다. 그중 절 반은 기독교인이었고, 여성도 5명이나 포함되었다. 그날 밤 9시경 표학선, 이효성 두 여성을 제외하고 여성 3명이 석방되었다. 석방된 여성들은 주재소에 서 발가벗긴 채로 구타당하며 모욕과 가혹행위를 당 했다고 했다. 이 소식이 온마을에 퍼져나갔다. 1893년 설립된 안악장로교회 독립선언서(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