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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⑯ 113 1910년에는 신원동에 의병 5명 이 출현했다는 보고도 보인다. 이 시기 용인이나 광주 일대에서 활 약하던 의병이 현재의 서초구 지 역에도 자주 출몰했던 것으로 보 인다. 3·1운동에 나선 양재리 사람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 산될 때 당시 양재리(현 서초구 양 재동) 사람들도 3월 26일과 3월 28일 이틀에 걸쳐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 만세운동은 일 제의 비밀보고서 「독립운동에 관 한 건(제29보)」와 「조선소요사건 일람표」, 『매일신보』 등에서 확인 되는데, 3월 26일과 28일 모두 3 백여 명의 군중이 각각 참여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틀의 시위는 특별한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진 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28일의 시 위에서는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두 명의 시위 참여자가 일경에 검 거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나선 동덕여고보 학생과 교사들 방배동에 있는 동덕여고는 1908년에 건립된 동원여자의숙 과 동덕여자의숙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11년 손병희를 설립자, 조동식을 교장으로 하여 3년제 동덕여학교로 개편된 이래 1926 년부터는 동덕여고보로, 1938년 부터는 동덕고등여학교로 운영되 었다. 교정은 종로구 서린동에 있 다가 1915년에 관훈동으로 이전 하였고, 1933년 창신동 시대를 거쳐 1986년부터 방배동에 자리 잡고 있다. 동덕(同德)은 동덕여고보 시절 인 1930년대 여성 독립운동가의 메카 역할을 수행했다. 박진홍·이 효정·이순금·이경선·유순희·박선 숙·이병희·이종희 등 동덕여고보 출신들은 재학시절은 물론 졸업 이후에도 경성준비그룹, 경성콤 그룹 등에 참여하면서 1930~40 년대 사회주의계 노동운동의 핵 심적인 여성운동가로 활약했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7호방에는 구속된 박진홍(1914-?)과 이효정 (1913-2010)이 1935년 4월 경 감옥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이 재 현되어 있다. 이때 임신 중이던 박 진홍은 감옥에서 아이를 출산하 는 고통마저 감내해야 했다. 박진 ➊ ➊  3월 26일의 양재리 만세운동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1919.3.30)  ➋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동덕여고보 학생들의 동맹휴학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29.12.28)  ➌  용수로 얼굴을 가린 채 재판정으로 향하고 있는 박진홍(1936.7.16, 『조선중앙일보』) ➋ ➌